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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감시자가 될 것인가, 개혁의 주체가 될 것인가
권력의 감시자가 될 것인가, 개혁의 주체가 될 것인가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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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쟁점] 비주류에서 주류로, 고뇌하는 진보진영의 학자들

시쳇말로 진보적인 학자군이 ‘떴다.’ 한때는 적이라며 등을 돌리던 보수적인 일간지들도 앞다퉈 운동권을, 진보진영을 주류의 새로운 경향이라고 띄우면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는 인상이다.

대구사회연구소(소장 김형기 경북대 교수, 이하 대사연)는 노무현의 ‘싱크탱크’가 아니냐며 세간에 이름을 날렸고, 학술단체협의회(상임대표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민교협(회장 서관모 충북대 교수) 소속 교수들의 정치적 행보에 관심 기울이는 이들도 많아졌다. 개혁을 표방한 정부이기에 학자들의 정치참여도 반기는 듯 했다. 그러나 사회의 신주류라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와는 달리 진보진영은 그 행보를 결정하는 데 있어  논란을 벌이고 있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는 대사연과 참여사회연구소에 사퇴서를 제출했다. 학단협 산하의 민주주의 법학연구소에도 같은 뜻을 밝혔다. “어떤 권력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고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평소 생각 때문이었다. “소박하게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시작했던 연구소가 세간에 이름을 날리면서, 정치색을 띠게 된 것은 사실”이라며 “종래에 지식인들이 가지던 사회 비판적인 기능이 퇴색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개인의 정치참여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없기에, 박 교수는 단체를 떠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진보적이던 학자들이 내놓은 정책들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라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진보진영 갈등 보여주는 대사연의 상징적 행보

1985년에 문을 연 대사연은 대구·경북 지역의 학자군들이 만든 지역발전을 위한 연구 및 정책을 내놓는 단체다. ‘지방분권’ 또한 대사연의 작품. 그러나 대사연 멤버들이 역대 정권에 참여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간 진보적 성향을 띤 대구·경북지역 인재의 용처가 없었던 탓이기도 하고, 창립 이후 계속된 정치적 중립을 지향하던 흐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 대사연으로서도 이번 인수위 인사는 ‘사건’이었다. 대사연 출신으로 인수위에서 활동한 인사들은 사회·문화·여성분과 위원장 권기홍 교수(영남대 경제금융학부), 경제1분과위 간사 이정우 교수(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국민참여센터 본부장 이종오 교수(계명대 사회학과).

이런 고민은 박 교수의 것만은 아니었다. 지난달 19일 학단협이 주최한 토론회의 주제는 ‘21세기 지식 학술운동의 전망과 대안’. 이날 조희연 교수는 ‘변화 속의 지식인 운동과 학술운동’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진보 학술운동의 정체성이 모호해질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정부 이후 특별히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비판적·진보적 지식인들이 일정하게 ‘참여지식인’으로 변화하는 경우가 많아서 참여와 비참여의 경계가 희석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참여를 ‘변절’로 보는 관점도 변화하고 있다.

조 교수는 “이 변화는 역시 진보적 학술진영의 헌신의 결과이지만 여기서 비판적·진보적 지식인진영이 결코 참여지식인으로 동일시돼서도 안되고, 참여지식인의 참여로 ‘개혁돼 갈’ 정치사회에 대한 보다 확고한 지적 비판진영으로 자신을 확고하게 재정립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개혁 정부의 성립으로 시민사회의 불만이 혁명적 방향보다는 제도화된 통로를 통해 표출됨으로써 오히려 시민사회의 수동화가 촉진될 수 있다는 우려이다. 조 교수가 바라는 방향은 “참여지식인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진보적 지식인의 활동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권력을 참여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과 감시의 대상으로 재설정 하면서 비판적, 진보적 진영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수위에서 활동했던 김대환 인하대 교수(경제학)를 비롯, 이종오 교수, 이정우 교수, 정태인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정치학)교수 등이 학단협 소속 회원들이다.

진보진영의 방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와 달리,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열린 시선을 두고 있는 학자들도 많다. 김형기 대사연 소장은 “대사연은 정치적인 중립을 지향한다. 이번 인사도 연구소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며, 앞으로의 활동도 계속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개인의 정체성과 연구소의 정체성을 혼동하지 말라는 주문. 단체의 정체성은 유지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변화할 수 있을 때 하자” 참여측 목소리

인수위에 참가한 정해구 교수는 “학자들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정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참여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정치참여와 비판적인 시각 유지를 지나치게 나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진보진영의 정치참여를 옹호하는 입장을 밝혔는데, 그 이유는 “제도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때 최대한 변화를 끌어낼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녹색당, 사민당처럼 진보세력·시민사회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인수위 활동 후, 한국정치가 기반한 구체적인 조건들과 진보진영의 요구안의 괴리가 크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라며 현실화 될 수 있는 담론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이 문제는 지난달 초에 열린 ‘사회포럼 연대와 성찰 2003’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시민단체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우려와 참여의 필요성이 팽팽히 대립했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정대화 상지대 교수(정치학)는 “시민단체가 적극적으로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정치 권력의 변화는 진보진영에 또 다른 화두를 던졌다. 아직 뚜렷한 정치적인 노선을 밝힌 교수는 없지만, 그 가능성이 충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정치적 참여까지 막을 수는 없다는 기본적인 합의를 제외하면, 진보진영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은 아직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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