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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일상’을 살다간 여성들 호명
전쟁과 분단의 일상’을 살다간 여성들 호명
  • 이은정 기자
  • 승인 2003.02.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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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소설 ‘침묵으로 지은 집’ 발표한 사회학자 조은 교수

“소설 때문에 인터뷰를 하는 건가요, 아니면 교수가 소설을 썼기 때문에 인터뷰를 하는 건가요?”
이 질문은 기자를 적잖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자칫 잘못 대답했다가는 인터뷰가 성사되지 않겠다는 조바심이 들기도 해서였지만 기실 둘 다 인터뷰를 하고자 하는 이유라 딱 꼬집어 답하기 어려웠다. 문학 전공이 아닌 교수가 소설을, 그것도 장편소설을 쓴 것도 화제이지만 그 내용은 초보 소설가의 솜씨치고는 무게와 깊이가 남다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은 동국대 교수(사회학)가 장편 소설 ‘침묵으로 지은 집’(문학동네)을 내놓았다. 자신이 낸 소설을 두고 “사고를 친 셈”이라며 웃는 조 교수를 연구실에서 만나봤다.

이 소설에서 조 교수는 다섯 살,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되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의 아픈 기억들을 담담하게 쏟아내고 있다. 결혼한지 석 달만에 혼자돼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남편의 아이로 키웠던 가회동 숙모, 해금 시인인 정지용의 향수를 읊어준 선배 언니, 의문사한 동생과 그의 약혼녀 등 ‘전쟁과 분단의 일상의 곁’에서 살다간 여러 여성들이 그녀의 기억을 타고 소급되기 때문일까. 소설이 가지고 있는 형식은 어느새 해체돼 낯설기 그지없다. 하나의 소설이라 하기에는 많은 이야기가 넘쳐나고, 옴니버스 형식이라 하기엔 반세기를 이어온 화자의 일관된 시선이 무겁다.

“특정한 플롯을 의도적으로 두지 않았다”는 조 교수는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없어요. 화자인 ‘내’가 있지만 주인공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이 주인공인 거죠”라 말한다. 역사의 뒤안에서 침묵하고 있는 집단, 아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집단’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잠금쇠를 여는 것, 그것으로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침묵된 기억을 말하게 되는 것, 이것이 그녀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유다.

조 교수가 서있어야 했던 현실도 그녀의 소설 쓰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지난 해 같은 학교에 몸담고 있는 교수에게서 고소를 당하는 ‘사건’에 휘말려 무던히 방해를 받기도 했지만, 더욱 글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있어서 만큼은 ‘전화위복’이 된 것.

“한 장의 메모도 없이” 오로지 ‘기억으로 엮어진 타래’를 거슬러 올라가며 쓴 소설이지만 켜켜이 배어든 경험에서 나오는 기억은 한 권의 일기장보다 정확해 사회사적 자료로 쓰이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동료 교수들이 이 소설을 수업시간에 활용해야겠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학과 사회학이 가로지르는 지점이기도 하다.

소설을 하나 내긴 했지만 발간 후 사람들의 반응을 조목조목 조사하는 것을 보면 조 교수는 천상 사회학자다. 사회학자로서 소설 발간 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젊은 세대들의 반응. 젊은 세대들에게 물어봤더니 소설에서 가장 허구인 부분은 사실로, 가장 사실적인 것은 허구로 생각한단다. “그들에게 이 소설이 SF 소설처럼 읽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젊은 세대에게는 현실을 넘어설 수 없는 상상의 공간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현실로. ‘침묵’의 골은 그만큼 깊고도 넓은 것일까.

인터뷰 말미에 “어디까지가 사실이냐”고 은근슬쩍 건넨 질문에 “100% 논픽션, 100% 픽션”이라 대답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우문현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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