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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이 유포한 두려움과 연민의 기록사
단절이 유포한 두려움과 연민의 기록사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승인 2003.02.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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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남북의 경계에 선 영화, 오발탄에서 이중간첩까지

1999년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 ‘쉬리’가 블록버스터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분단은 우리의 현실이고, 실재이며, 역사이다. 그것이 가상의 시공간 속에서 거대한 스펙터클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관객들로 하여금 열광을 이끌어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더 이상 분단은 심각한 현실이 아니라 서로 총구를 겨누고 긴장감을 즐기는 두 시간 짜리 오락거리였다.

하지만 그 심층으로 내려가 보면 ‘쉬리’는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쉬리’가 심리적으로, 대중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유중원이 사랑한 이방희라는 존재 때문이다. 그는 유중원의 사랑이자 증오의 대상이다. 이 기묘한 멜로 드라마의 이중성이야말로 엉성한 액션 장면들과 오락거리를 채운 비책이었다. 수백만의 관객들이 ‘쉬리’에 긴장감을 느끼고 공감을 표한 것은 유중원이 처한 이중의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것. 그것은 통속적인 연인들의 이야기를 넘어서 한반도를 지배해 온 분단 이후의 상황을 함축하는 것이다. 한 핏줄이니 사랑해주고 통일은 해야 하겠는데, 그 동안의 단절이 두려움을 유포시켰다. 분단의 비극, 분단의 이중성이란 이런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들먹이자면 분단은 항상 반공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읍내 단체관람으로 본 영화는 임권택 감독이 만든 ‘아벤과 공수군단’이었다.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배우가 옷을 벗는 장면에서 애들이 소리치는 바람에 어둡게 화면을 만들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 종종 있던 일이었다. 보다 뚜렷하게 내용이 기억나는 것은 ‘똘이장군’ 시리즈이다. 김일성을 돼지로, 여간첩을 여우로, 북한병사들을 늑대로 그린 애니메이션은 학교강당에서 무료로 단체관람을 했다.

남과 북, 동전의 양면

영화를 통한 반공교육의 사례였던 이 경험은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는 이승복의 신화와 함께 남한 어린이 대부분의 머리 속에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이처럼 반공영화가 대중들에게 유포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정부 시책에 따른 무분별한 영화 교육도 자리를 잡고 있지만 정부가 직접 개입해 이른바 ‘외국영화 수입쿼터’의 보상을 전제하면서 반공영화 제작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쉽게 풀자면, 외국 영화 수입권을 얻는 대신 극장주들이나 제작자들은 반공영화 제작에 투자를 해야만 했다. 상당수의 ‘방화’(당시 한국영화를 지칭하는 말)가 반공영화나 계몽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대중영화로서의 ‘쉬리’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북한은 악의 축이 아니라 유중원이 사랑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 이중성의 깨달음은 대중영화를 화해의 무드로 옮겨 놓는다. ‘공동경비구역 JSA’, ‘휘파람 공주’에 이르기까지 가상적인 공간과 상황 안에서 그들은 사랑과 이별을 동시에 경험한다.

그런데 ‘이중간첩’은 조금은 색다른 카드를 들고 나왔다. ‘JSA’나 ‘쉬리’처럼 남과 북을 균형있게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더 나아가 북한의 남파간첩 림병호의 시선으로 영화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간첩 리철진’에서 시도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중간첩’은 풍자나 코미디가 아니라 진지하게 림병호의 행적을 쫓는다. 꽤나 과감한 정면 돌파를 시도한 경우인데,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묵직한 상황들을 송강호의 농담으로 풀어갔던 것을 생각한다면 대중영화로서는 깊숙이 발을 담근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중간첩’의 흥행부진은 무거운 상황을 무겁게 끌고간 수사학의 실패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중간첩’은 파열적으로 우리의 현실을 호출한다. 고문에서 풀려난 림병호가 처음으로 배치되는 것은 북파공작원을 교육하는 강원도의 한 부대이다.
애초부터 시나리오 상에서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북파공작원’은 최근에서야 그 존재가 공식적으로 확인됐고, 최근에서야 가시화된 존재인데 ‘이중간첩’은 이러한 소재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림병호의 귀순과정을 통해 1980년대 소문만 무성하던 남측의 폭력과 억압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귀순간첩 림병호의 무모함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북측이 림병호를 남파했다면, 남쪽 역시 북파공작원을 양성하고 그들을 청진항에 투입하는 작전을 펼친다. 이러한 상황이 남파공작원 림병호를 거쳐 전개된다는 점에서 ‘이중간첩’의 아이러니는 충분히 매력을 발휘한다.

현실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분단영화

사실 그 어떤 분단영화도 우리의 현실과 무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요한 많은 영화들은 분단이 시작된 지 오래지 않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 신상옥의 ‘지옥화’(1959), 유현목의 ‘오발탄’(1961), ‘순교자’(1965), 김기덕의 ‘남과 북’, 김수용의 ‘사격장 아이들’(1967), 이만희의 ‘귀로’(1967) 등 다양한 형태의 분단 영화들이 영화사를 장식해 왔다. 김기덕의 ‘남과 북’은 한운사의 인기 방송극을 영화로 옮긴 것으로 분단의 상황을 로맨스(엄앵란과 신성일)로 봉합하려는 전형적인 드라마의 효시였다. 검열과 시대상황에 의해 실패한 분단 멜로물이라 할 수 있지만 ‘쉬리’의 상상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는 것을 ‘남과 북’은 보여주고 있다.

‘순교자’처럼 재미작가의 원작을 각색하여 전쟁 드라마와 휴먼 드라마를 뒤섞은 예도 있지만 ‘지옥화’, ‘오발탄’, ‘귀로’ 등은 분단 후의 상처받은 남한 사람들의 삶을 좇는 것에 주력한다. 사실 상당수의 전쟁영화들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같은 뻔한 전쟁영화였고, 넓은 의미의 분단영화 중 소중한 작품들은 분단의 상처를 안고 사는 서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지옥화’에서 양공주로 살아가는 최은희의 캐릭터처럼, 폭력적인 정치상황과 미군들의 득세는 ‘은마는 오지 않는다’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이미지 중 하나였다.

끝으로 ‘이중간첩’과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 중의 하나는 국내에 개봉하기도 전에 일본 시장에 팔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쉬리’가 일본에서 성공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의 분단영화를 자신들의 정치학 안에서 흥미롭게 바라보는 국가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들이 ‘쉬리’, ‘이중간첩’에 열광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최근 급변하는 국제정세처럼 분단의 이미지들은 다양한 역학 속에서 새로운 독해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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