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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학 평가는 본연의 기준에 맞게”
“영어학 평가는 본연의 기준에 맞게”
  • 한학성 경희대
  • 승인 2003.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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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고] 한국어 연구가 영어학인가

국내 영어학 교수들이 국외에서 발표하는 논문의 거의 대부분은 한국어에 관한 것이다. 그나마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 중심이 돼 해외에서 개최하는 소위 국제 한국어 학회나 학계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름 뿐의 국제 학회에서 발표되는 것이 현실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국내 영어학 교수들이 국제 논문이라고 보고하는 논문의 90% 이상이 한국어에 관한 것이며, 그 중 90% 이상이 허울 뿐의 국제 학회에서 발표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이런 논문들이 상당수 대학이나 학술진흥재단의 평가에서 ‘국제’적 수준의 ‘영어학’ 연구실적물로 잘못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언어학 관련 모임의 대표를 지낸 어느 영어학 교수는 그 동안 수십 편의 국외 논문 실적이 있는 것으로 학진에 등재돼 있으나, 거의 모두가 한국어에 관한 것이며, 그나마 저명한 국제 학회나 정식 해외 저널에 발표된 논문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양상의 국외 논문 실적에 힘입어 학진으로부터 다양한 연구비 지원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이런 잘못된 관행 때문에 우리 나름의 영어학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의식 있는 학자들은 학진의 연구비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소속 대학에서도 유능하지 못한 연구자로 평가받기가 일쑤이다. 이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이 문제와 관련한 학진의 태도는 대단히 실망스럽다. 학진의 입장은 이 문제는 영어학계 내부의 문제로서 학진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학진이 진정으로 학술 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기구라면, 그 동안 영어학 분야에 지원된 연구비가 과연 얼마나 영어학 진흥에 기여를 했는지를 심각하게 반성해 봐야 한다. 영어학 분야에 지원된 연구비의 상당 부분이 결과적으로 허울 뿐의 국제 학회에서 발표된 ‘한국어’ 연구에 사용되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영어학’ 진흥에 기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더구나 엄청난 사업비가 투입된 BK21의 영어학 지원 사업의 결과물도 대부분 이런 형편이라면, 이것이 어떻게 영어학을 진흥하고자 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 학진은 영어학 연구 업적 평가와 관련한 그 동안의 잘못된 관행을 적극적으로 바로잡는 노력을 해야 한다.이를 단순히 영어학계 내부의 문제라고 방치하는 것은 마치 대입 시험에서 국어 성적을 영어 성적으로 평가하는 학교측 잘못을 학교 내부의 문제라고 방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혹자는 영어학자가 한국어에 관심을 갖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반문한다. 이는 한국어 연구가 영어학이냐는 문제 제기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 아니다. 물론 영어학자가 한국어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어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학 분야의 평가는 영어학 본연의 기준에 맞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끼리 적당히 해외에 나가 배드민턴 시합을 한 것을 가지고 국제적인 테니스 선수라는 평가를 내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런 식의 평가가 부당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우리 영어학계에서는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

한학성 / 경희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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