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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원 강연원고도 서평인 나라
학술원 강연원고도 서평인 나라
  • 조승래 청주대
  • 승인 2003.02.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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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더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우리나라의 독서 시장은 양적인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교양층도 두텁게 형성돼가고 있다. 그런데 막상 변변한 고급 서평지가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아하다. 그나마 현재 독자들이 의존할 수 있는 독서 정보는 중앙 일간지의 주말 판에 4면 정도 할애되는 책 소개가 거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책 소개 기사 중에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쓴 깊이 있는 서평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한된 지면과 인적 자원 때문에 그야말로 책 소개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좋은 책인데도 소개조차 안되거나 되더라도 너무나 피상적인 경우가 많아서 아쉽고 깊이도 없는 책들이 장황하게 소개돼 의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듯 고급 서평지의 부재는 독서 수준의 하향과 시장의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신념있는 주류의 가치관 대변

이런 문제는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찍이 ‘더 타임스’는 1902년부터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의 부록지로서 고급 서평지를 더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TLS)라는 이름으로 주간으로 펴내기 시작했다. 영국의(서양의) 사회와 문화의 중심 문제들 그리고 시대의 주된 지적 논쟁들을 전문가들의 서평을 통해 소개하고 비판함으로써 사회 문화 비평과 학술 비평을 동시에 수행한 TLS는 20세기를 통해 전문 서평지로서 그 위상을 굳혀갔다. 최근의 TLS를 보면 철학, 역사, 종교, 고전, 픽션, 시, 문학 비평, 외국 문학, 음악, 미술, 과학, 정치, 사회 문제 등의 꼭지들이 거의 고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서평의 대상이 되는 서적들을 보면 시사적인 문제와 대중적인 관심을 다룬 서적보다는 학술 서적이나 전문성을 띤 서적이 좀더 많이 선정되고 있다. TLS의 이런 편집 방침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인문학 전문 서적들을 교양 독서층에 충실하게 소개해 줌으로써 고전적 인문 정신이 영국 주류 사회에 보존되게 하려는 것이다. 더 타임스의 성격상 TLS는 영국 사회와 지성계의 주류의 가치를 반영하는 데 주력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필자의 전공 분야인 역사학에 있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 역사 이론과 서술에 대한 소위 정통 역사학의 신랄한 비판이 처음 제기된 곳도 바로 TLS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않으려는 지적 도덕적 파탄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TLS가 도그마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버지니아 울프와 T. S. 엘리어트에 대한 과거의 잘못된 평가를 반성하는 지적 유연함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TLS의 이런 성격과는 거리가 있는 또 하나의 고급 서평지가 ‘런던 리뷰 오브 북스’(LRB)다. 원래 1979년 더 타임스의 직장폐쇄에 맞서던 노조원들이 뛰쳐나와 만든 LRB는 비교적 진보적인 성격의 독립 전문 서평지임을 자부한다. 에드워드 사이드, 테리 이글턴, 앨런 베넷, 프랭크 커모드 등 자주 등장하는 평자들의 면면을 봐도 이 서평지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반월간으로 나오는 LRB는 TLS와는 달리 앨런 베넷의 일기와 피터 캠벨의 미술 비평 외에는 고정적인 꼭지도 없고 학술 서적에 대한 경도도 없다.

근거있는 비판과 명쾌한 해석

그렇다고 해서 LRB가 학술적 가치가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회 정치적 현실 문제를 다루는 사회 과학 서적에 대한 서평은 학술적이면서도 시사성이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됐던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에 대한 옥스퍼드대의 정치철학자 맬컴 불의 서평은 네그리의 난해한 스피노자적 정치 철학과 지구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명쾌하게 꿰뚫고 있으면서 반전체주의적 관점에서 그 문제점을 예리하게 제기한 최고의 서평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지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제이아 벌린의 ‘자유론’ 신편집판에 대한 캠브리지대 근대사 흠정교수 퀜틴 스키너의 서평은 신자유주의적 자유론의 문제점을 공화주의에 입각해 비판한 격조 높은 사회 비평으로서 그 자체가 영국 학술원의 초청 강연 원고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문사들이 독자들에게 자전거를 공짜로 선사하는 대신 이런 고급 서평지를 만들어서 돈 받고 파는 날이 오기를 빌 뿐이다.

조승래 / 청주대·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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