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23:10 (금)
거울과 몸 -‘야생초 편지’
거울과 몸 -‘야생초 편지’
  • 박순성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3.03.1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수영은 잘 닦여진 거울이다. 더구나 아주 독특한 거울이다. 극단에 치우친 정신일수록 거울에 비친 자신의 힘이 엷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사랑할 때, 문학은 비로소 우리에게 문을 연다. - 황동규
거울이 인류의 문명사에서 갖는 의미를 밝히는 작업이 문화인류학에서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쳐다볼 수 있도록 해준 거울은 분명 인간의 의식이 작용하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종종 거울은 하나의 기준을 제공한다. 도덕철학자에게 사회는 판단을 위한 거울이다. 신 앞에 홀로 서 있다면, 인간은 도덕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자기 자신을 비춰 볼 거울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사회의 거울은 흐린 경우가 많지만, 잘 닦는다면 극단에 치우친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다. 아니면, 거울 없는 실내에서 죄를 품고 잠들 수도 있다-오감도.
때로 거울은 너무나 투명해, 모든 것을 그대로 통과시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거울을 지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 우리는 거울 앞에 선 자신과 거울에 비친 자신을 구분하지 않는다. 긴 하루를 거울 속에 앉아 머리를 빗는 엘자에게 비극은 시작도 끝도 없다. 가상과 실재의 경계가 무너지고, 우리는 현실의 이면에서 다른 현실을 얻으려 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삶에게 환상은 유일한 위로다.
도덕판단을 강요하지도 않고, 환상으로 유혹하지도 않는 거울은 존재하는가. 우리의 자의식을 지나치게 일깨우지도 않고,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키지도 않는 시인은 어디에 있는가. 예언자의 외침도, 노예의 미사여구도 아닌 시는 가능한가. 어떻게 우리는 김수영의 거울을 스스로 경험할 수 있을까.
이미 여행조차 쫓기는 일상생활의 연장이 돼버린 요사이, 선물로 받은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는 며칠 간의 출장에서 좋은 벗이었다. 그가 야생초를 키우고 뜯어먹고 그리면서 깨달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나에게 ‘하나의 경험’이었다. 언제부턴가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던, 닫힌 세계에 사는 이가 열린 거대사회의 눈먼 자에게 보내는 자유의 메시지였다.
그는 말한다. 몸은 나에게 우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가 좁은 방에서 씁쓰레한 야생초의 뒷맛을 입안에 가득 담고 우주의 소리에 맞춰 가만히 흔들고 있는 몸은 잘 닦여진 거울이 된다. 그의 정신은 깊게 울리는 그의 몸을 들여다본다. 지친 정신의 여기저기에 생겨난 상처들이 아문다. 육신은 영혼의 사닥다리라고 했던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나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손으로 얼굴을 만지니 자라지도 못한 수염이 부서져 내리던 악몽을 잊을 수 없다. 이 봄, 야생초 달인 차로 악몽의 기억을 씻어내어야 할까 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