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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수상] 불누아의 ‘존재와 재현’
[독서수상] 불누아의 ‘존재와 재현’
  • 정과리 연세대
  • 승인 2001.01.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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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16 13:55:44
정과리 / 서평위원·연세대

올리비에 불누아(Olivier Boulnois)의 ‘존재와 재현’(PUF, 1999)을 쉬엄쉬엄 읽는다. 13세기 말엽의 망각된 중세 신학자 둔스 스코트(Duns Scot)의 저작에서 근대적 사유의 기원을 찾고 있는 책이다. 개요는 이렇다. 아랍을 우회하여 들어 온 아리스토텔레스는 종래 유럽의, 그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했던, 신학의 기본 개념들을 결정적으로 대체한다. 첫째, 순전히 사실의 수용만을 담당했던 인식에 의도성과 상상이라는 새로운 기능들이 첨가된다. 그럼으로써 진술이 사실과 일치하는가가 아니라 재현 가능성이 진리의 표지가 된다. 둘째, 재현자로서의 존재는 일의적이라는 것. 이로써 신과 인간의 통로가 열린다. 셋째, 지능은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그 거울을 생산하는 원리이다, 라는 지성에 대한 새로운 규정. 이를 통해, 이데아는 모방해야 할 ‘전범’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 작용의 ‘결과’가 된다.

책을 읽으며, 나는 하나를 확인하고 하나를 깨닫는다. 우선 확인한 것. 근대는 정치 사회학적으로만 포착될 것이 아니라 삶의 전 분야에 걸쳐 살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넓혀 보면, 근대는 18세기 이후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자크 르 고프가 장기지속의 중세를 말할 때 근거했던 똑같은 현상을 두고 ‘장기 생성’의 근대를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로부터 확인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시대들은 항상 겹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어, 봉건, 근대, 탈근대라는 “삼겹살”의 시간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지나치게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가 그 삼겹살의 몸뚱이를 두고 “곤고함”을 느끼고 회매한 근대를 낭패하고 말았다고 한탄하는 것은 엄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 것 하나. 아랍을 우회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계승된 아리스토텔레스를 뒤집었다는 것. 다시 말해, 타자는 나를 키우는 따뜻한 햇빛이고 매운 바람이라는 것. 그러니까 모방은 죄가 아니다. 모방에만 급급한 것은 아둔함이고 모방을 재빨리 창조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창조라고 우기거나 창조를 재촉하거나 매 한가지로, 탐욕이다. 더 과감하게 말하면, 창조란 없다. 모방의 교류만이 있는 것이고, 그 교류가 정직하고 공평하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내가 너에 대해서든, 네가 나에 대해서든.

불행하게도 그것이 일반의 동의를 얻고 실천된 적은 없었다. 둔스 스코트가 어떻게 길을 열었는가에 관계없이 그를 망각의 덤불 속에 처박고 지나간 동족들은 어느 날 문득 자신을 근대의 창설자로 선언하리라. 불누아가 그를 재발견했다 하더라도 덤불 속의 생의 곤고함은 변하지 않는다. 장기 생성의 시간은 반복 수난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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