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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정치학자의 유럽 지성의 정신적 기원 엿보기
美 정치학자의 유럽 지성의 정신적 기원 엿보기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1.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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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 『분별없는 열정』(마크 릴라 지음/서유경 옮김, 미토 刊)

지난 한해는 열정의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온 시간이었다. 창문을 열면 어디서나 군중의 열에 들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축제와 광장의 문화에 낯선 우리들은 가슴 밑바닥의 무엇까지도 남김없이 거리에 쏟아 부었다. 인간이 열정의 동물이란 걸 보여준 한편의 다큐멘터리였다.
집단의 정열은 스펙터클의 측면에서는 대단한 볼거리이지만, 평정심을 잃은 것이라는 점에서는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혹시 독일인들의 눈에 한국은 어떻게 들어왔을까. 불과 반세기 저쪽의 과거에 민족의 대단결을 실천한 바 있는 그들 할아버지 세대의 ‘분별없었던 열정’을 씁쓸하게 되씹어보지는 않았을까.

심리적으로 접근한 지식인 메시아주의

미국의 정치학자 마크 릴라가 지은 傳記 형식의 유럽지성사 ‘분별없는 열정’이 두 눈을 사로잡는 이유는 열정 앞에 붙어 있는 바로 이 ‘네거티브’한 형용사 때문이다. 이 책은 하이데거, 슈미트, 벤야민, 코제브, 푸코, 데리다 등 20세기 유럽 현대사상을 대부분 결정지은 사상의 師父들을 법정에 세운 다소 싸늘한 책이다. 이들의 혐의는 무분별한 열정으로 전체주의 정치체제에 가담했다는 것. 인종청소의 연기가 자욱했던 1930년대 라인강 남쪽 나라에서 철학과 법학으로 파시즘의 이론적 합리화 역할을 한 하이데거와 슈미트는 어느 정도 알려진 축에 속한다.

하지만 저자는 파시즘만이 아니라 유럽화된 맑시즘(거의 스탈린주의에 가까운) 또한 자유주의적 사고를 억압하는 전체성 체계라면서 비판적 유물사관과 시오니즘 사이에서 방황한 벤야민을 위태로운 존재로, 68혁명에 가담한 푸코를 이론과 실천이 배리된 무책임한 행동가로, ‘정의’(justice)라는 초월적 좌표를 설정, 맑시즘과 손잡고 해체론 이후의 철학을 열어가는 데리다를 방만한 메시아주의로 비판을 가한다.

아우슈비츠 이후 지식인의 정치참여에 대한 문헌은 많이 씌어졌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깍듯’ 유럽의 자기반성은 본질적인 대답을 회피해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은 사회사적인 접근이 탈개인화시키고 있는 역사적 죄과를 인간 심성의 차원에서 붙잡기 위해 지극히 심리학적이고도 고고학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있다. 저자는 야스퍼스, 게르숌 숄렘, 제임스 밀러 등 주변 사상가들의 기록물이나 후대의 정평난 평전을 자료 삼아서 하이데거 외 5인의 사상적 형성기를 풍부하게 되살려 놓는다.

기독교적 가정에서 성장한 하이데거와 슈미트, 유대주의의 세례를 받은 벤야민의 경우는 심성 속 깊이 박힌 종교적 멘탈리티가 강조되고, 푸코의 경우는 학창시절 동성애자로서 겪었던 수난의 개인사가 충격적으로 돋을새김된다. 이 약식 전기를 통해 저자가 주장하려는 바는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하이데거의 반유태주의와 전후의 고립적 태도가 독일 기독교 가정에서 유전된 심리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 푸코가 성, 광기, 마약, 자살 같은 인간의 한계경험에 몰두한 것은 자신의 개인적 삶을 이해하고 논구하기 위한 것이었지, 어떤 대의가 있어서는 아니었다는 것 등이다.

책의 후기에서 저자는 역사상의 전제정들은 신비주의, 메시아주의, 천년왕국설, 카발라주의 같이 대개 종말론으로 분류되는 사상들과 연관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대에도 똑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전제정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다룬 사상가들은 전제정 앞에서 “신의 왕국을 범속한 세계에 건설하겠다는 오래되고 비합리적인 충동”을 느꼈다. 추상적인 사유체계 속에서 전개되는 그런 ‘낭만주의’는 우람하고 아름답지만, 현실화 할 때는 타인에게 폐가 되고 순진한 발상으로 떨어진다는 게 저자의 전언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그는 책의 말미서 플라톤의 국가론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알레고리로 빌어온다.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꿈꾸며 아테네 학당을 떠나 시라쿠라로 건너가면서 폭군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시켜 철인왕으로 변모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포기했다. 자신이 전제화될 것을 두려워하고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삶이 고귀한 것도, 자기 삶에 내재된 전제적 성향을 최고도로 자각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전한다.

‘열정’에 대한 단순화 우려

이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편한 점도 있다. 이 미국인 정치학자는 20세기 유럽의 삶을 유전받지 않아서, 그래서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는지도 모르지만, 맑스주의나 반-제국담론을 전제정에 영감을 주는 전체주의 사상으로 묘사하는 그의 역사서술은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단순화의 논리에 따르고 있다는 느낌도 준다. 심지어 근대 민주주의 개념 속에 불어넣어진 종교적 열광과 메시아주의적 기대조차도 일종의 ‘대용종교’로 파악하는 그의 시선은, 인간 내면의 고유한 ‘충동’과 ‘열정’을 오직 다스려져야 되는 것으로만 몰고감으로써 본문의 풍부한 분석에 어울리지 않는 ‘용두사미’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어 아쉽다. 분석과 정리, 그리고 종합은 뛰어나지만, 저자의 진의가 담긴 알레고리는 어설프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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