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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⑫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⑫
  • 교수신문
  • 승인 2003.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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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선생님이 류영모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함 선생님이 오산학교에서 학생으로 공부하고 계셨던 1921년 9월이었다.

후에 자세히 다룰 기회가 오겠지만 선생님은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의 황해 바닷가 조그만 농촌에 태어나 당시 한의원을 하셨던 아버님 함형택(咸亨擇)씨 밑에서 물질적으로는 당시의 세태로 보아 비교적 넉넉한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보여진다. 한일합방이 1910년이고 보면 선생님 10세가 되는 해였으니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하고 남는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었지만 함 선생님이 유일한 육신의 아우 함석창씨도 당시 일본 구주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에서도 함 선생님의 가족 및 대소 일가는 매우 개명한 집안이었음이 확실하다. 특히 선생님 글에서 일형(一亨) 아저씨라는 분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함 선생님의 글을 직접 인용해 보자(전집 4권 211 쪽). <그 일형 아저씨는 인물로 났던 이입니다. 그런 시골 구석에 났으면서도 글 잘 알고 글씨 명필이고 체통 크고 기백 있어 농민혁명에 지도자 노릇했습니다. 그때 남들이 다 잠자고 있는 때에 그는 가산을 팔아 신학문을 공부시키기 위해 큰아들은 서울에, 작은아들은 일본 동경에, 사촌은 노령, 미국에 보냈습니다. 나는 글의 귀한 것을 그에게서 알았고 점잖은 것이 어떤 것임을 그에게서 보았습니다. 우리 가문이 온통 그 지방에서 민족주의 애국 운동의 중심이 되게 된 것은 주로 그의 영향이었습니다.>아마도 함일형 아저씨가 아니계셨다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함석헌은 없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위에서 말한 서울에 보낸 큰아들이 석규 목사요 둘째가 일본 동경에서 명치대학을 졸업한 석은(錫殷)씨이다. 함석규 목사는 함석헌을 아홉 살에 학습교인으로 세운 목사님이요 석은형은 명치대학을 졸업한 후에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이른봄에 승덕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3·1 운동 평남북 학생동원 책임을 맡았던 사람이다. 당시 평양고보에 재학중이던 함석헌은 자연스럽게 평양고보의 연락책임자가 됐다. 당시의 상황을 함 선생님의 글을 통해 직접 들어보자(전집 4권 128쪽).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받아 들던 때의 감격! 그날 평양 경찰서 앞에서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리고 돌아와서는 시가행진에 참가했는데 내 60이 되어오는 평생에 그날처럼 맘껏 뛰고 맘껏 부르짖고 그때처럼 상쾌한 때는 없었다. 목이 다 타 마르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팔목을 비트는 일본 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 꽂아가지고 행진해 오는 일본 군인과 마주 행진을 해 대들었다가 발길로 채여 태연히 짓밟히고도 일어서고, 평소에 처녀 같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 정말 먹었던 대동강 물이 도로 다 나오는 듯 했다. >‘생각하는 인생’의 시작



이렇게 열심히 부르짖었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잘못했다고 선생 앞에 사과하고 다시 평양고보에 복교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고향에 가서 한 두 해 머뭇거리다 서울로 올라와 다시 학업을 계속할 길을 찾았으나 모두 좌절되고 하릴없이 고향으로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때에 서울서 우연히 만나게 된 함석규 목사의 손에 이끌려 스물 한 살이라는 나이에 오산고보 3학년에 편입됐던 것이다. 함 선생님은 “이 오산학교에 간 것이야말로 하나님 발길에 채여서 된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평양고보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함석헌은 ‘생각하는 인생’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그는 장차 의사가 될 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산학교에 오게 됨으로써 그의 말대로 ‘생각하는 인생’이 뒤늦게 나마 시작됐고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게 됐다. 바로 이 무렵에 류영모 선생님이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셨던 것이다.

인생이라는 생각, 생명이란 생각 참 이런 것이 바로 그때에 시작됐으며 톨스토이 이야기, 노자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류영모 선생님에게서 들었고 일본 책으로 로망 롤랑, 베르그송, 입센, 브레이크 등을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읽었고 타고르의 노벨문학상 수상작품 ‘기탄잘리’를 보는 동시에 웰즈의 ‘세계문화사대계’를 대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고 말하고 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의 일생을 김흥호 선생이 풀이한 ‘다석일지’1권 뒤에 있는 ‘다석선생해 간추림’이라는 글에 의거해 간추려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890년 3월 13일(경인년 2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나 6세 때 서울 홍문서골 한문서당에 다니며 통감(通鑑)을 배우고 1900년 10세 때 수하동(水下洞) 소학교에 입학, 12세 때 자하문 밖 부암동 큰집 사랑에 차린 서당에 3년간 다니며 맹자(孟子)를 배웠다고 한다.

1905년 YMCA 한국인 초대 총무인 김정식(金貞植)의 인도로 기독교에 입신(入信)하고 서울 연동(蓮洞)교회에 나가는 한편 경성일어학당(京城日語學堂)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고 1909년 19세 때 경기도 양평에 정원모가 세운 양평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중에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 간 재직했으며 오산학교에 처음으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함으로써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에 입신케 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때 19세인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도 같이 오산학교에서 가르쳤으며 류영모는 한 살 위인 20세였다. 1912년 22세때 오산학교에서 톨스토이를 연구했으며 일본 동경물리학교에 입학 1년간 수학하고 있을 때 동경에서 우찌무라 간조의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 1915년 25세 때 김효정(金孝貞)을 아내로 맞이했고 1917년(27세)에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과 교우하여 잡지 ‘청춘(靑春)’에 수 편의 글을 발표했다. 1919년(29세)에 남강 이승훈이 3·1 운동 거사자금으로 기독교 쪽에서 모금한 돈 6천원을 아버지가 경영하는 경성피혁상점에 보관하는 일도 담당했다고 한다. 1921년 조만식(曺晩植)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1년간 재직했다. 1928년(38세)에 중앙 YMCA 간사 창주(滄株) 현동완(玄東完)의 간청으로 YMCA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지도했으며 1963년 현동완이 사망할때까지 약 35년간 이 모임을 계속했다. 한해 전인 1927년에 김교신(金敎臣)의 성서조선(聖書朝鮮) 잡지 동인들로부터 잡지를 같이 해나가자는 권고를 받았지만 사양했다고 하며 이 때부터 김교신으로부터 사사(師事)함을 받게 됐다고 한다.

다석 선생의 삶의 여정


1935년(38세)에 서울 적선동에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농사 지으러 이사했고 1939년 49세 때 마음의 전기를 맞아 예수 정신을 신앙의 기조로 정했으며 1일 1식과 금욕생활의 실천에 들어 갔다. 이른바 안해와의 해혼(解婚) 선언을 하고 잣나무 널 위에서 자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해혼이란 이혼이 아니라 안해와 동거생활하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성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1942년(52세) ‘성서조선’사건으로 57일간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기도 했으며 1948년(58세)에는 함석헌 YMCA일요집회에 찬조 강의를 하기도 했으나 중단했고 1950년(60세)에는 YMCA 총무 현동완의 억지로 다석 2만2천일 기념을 YMCA회관에서 거행했다. 1955년(65세) 때 1년 뒤 1956년 4월 26일에 죽는다는 사망 예정일을 선포하기도 했으며 ‘다석일지’(多夕日誌)를 쓰기 시작했다. 1961년 (71세) 12월 21일 외손녀와 함께 옥상에 올라갔다가 낙상하여 서울 대학병원에 28일간 입원했다가 퇴원했으니 이때부터 다소 정신상태에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1981년(91세) 2월 3일 오후 6시 30분 90년 10개월 21일만에 숨을 거둘 때까지 10년 가까이 소위 근자에 말하는 알쯔하이머 질환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선생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날짜를 헤아리는 것과 일종식을 하는 것 두 가지인데 나도 처음에는 생일을 음력으로만 알뿐이었는데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으므로 양력으로 하게 됐고 날을 헤아리게도 됐습니다. 더구나 생일이 선생님과 같은 날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범연하게 보시지 않는 선생님이 더 신기하게 여겨졌습니다. 음력으로 선생님은 2월 23일생이신데 나는 정월 23일이고 양력으로는 똑같은 3월 13일로 만 11년 날로 해서 41,017일입니다.>(‘제소리’(김흥호 편, 솔출판사刊, 2001년 발행)에 수록되어 있는 함석헌의 ‘젊은 류영모 선생님’이라는 글 중에서). 한가지 더 기이한 일은 함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이 1989년 2월 4일이었다는 점이다. 함 선생님 돌아가셨을 때 주위 사람들은 류 선생님과 같은 날 돌아가시기가 송구스러워 그날을 넘긴 다음날 돌아가신 것이라고 말하면서 눈물지었던 생각이 난다.

김흥호 전집 ‘다석일지 공부’ 제 1권 1955년 7월 6일 23856일의 일지는 다음과 같다.
“호흡:一日呼吸 二萬五千回, 人生古稀 二萬五千日, 六時間息 六千二百五十番, 七十年中 六億二千五百繁”
류영모 선생님의 편모가 엿보이는 일기장 내용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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