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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두 얼굴의 인터넷 세상
[문화비평] 두 얼굴의 인터넷 세상
  • 박병철 (서울대 강사·물리학)
  • 승인 2003.01.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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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애플사의 개인용 컴퓨터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됐을 때, 사람들은 그 물건을 신기한 장난감 정도로 취급했었다. 본체를 제외한 주변기기라고는 모니터와 키보드뿐이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워드 프로세싱과 몇 가지 간단한 게임이 전부였으니, 그 문명의 이기가 차후에 세계를 제패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컴퓨터는 초고속으로 성장해 ‘이기’ 라는 말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대책 없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게다가 그 막강한 연산능력에 인터넷이라는 날개까지 달아놓았으니, 비유하자면 씨족사회로부터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시대까지의 변천과정을 단 수십 년 사이에 겪은 셈이다.

일상 지배하는 거대그물, '인터넷'

사실 따지고 보면, 문명의 이기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 작업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높여주는 일종의 보조장치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동차 없이도 얼마든지 걸어서 이동할 수 있고, 계산기가 없어도 복리이자를 계산할 수 있으며, 핸드폰이 없어도 지인들과 새해인사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극도로 높아진 효율성에 이미 길들여진 우리들은 자동차나 핸드폰이 없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단계에서 그들과 일체감을 느끼는 단계로 우리의 의식도 어느새 진화한 것이다.

기계를 이용해 우리의 노동량이 절약됐다는 것은 절약된 노동량, 또는 그 이상의 공해가 어디선가 생산됐음을 뜻한다. 과거에 컴퓨터를 이용한 워드프로세싱이 처음 등장했을 때, 성급한 사람들은 앞으로 종이의 사용량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었다. 요즈음, 중요한 문서들을 파일의 형태로 주고받는 것이 일상화됐으니 일견 그들의 예상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컴퓨터의 성능(메모리, 하드디스크, 연산처리 속도 등)은 20년 전 보다 거의 1천 배 이상 향상됐지만, 한 장의 문서를 작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오히려 더 길어졌다. 복잡한 기능들이 추가돼 사용방법이 복잡해졌을 뿐만 아니라, 출력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종이쓰레기가 양산돼 시간과 물자가 낭비되고, 전달과정에서 보안을 걱정해야 하는 의외의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은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각해, 그 폐단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우리의 일상사가 됐다.

아무리 폐단이 많다 해도, 컴퓨터와 인터넷은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우리 생활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도청이 난무하고 사용요금이 몇 배로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전화의 입지가 아직도 굳건하듯이, 인터넷의 전성시대는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최근 들어 인터넷은 사회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에도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다. 심지어는 정부의 관리들까지도 인터넷을 통한 추천으로 임명될 판이다. 적법한 한계 내에서 문명의 이기를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사용자의 자유겠으나, 말 그대로 ‘정보의 바다’에서 순항하던 배를 개조해 밑창에 바퀴를 달아 육지에서도 사용하려는 의도는 다분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참여정치와 인터넷을 통한 참여정치는 그 동기의 순수성과 질적인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 강국, 국가 경쟁력과는 별도

나는 학생들에게 과제물을 내주지 않는다. 그것은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마우스를 끌고 당기는 기술을 익히는 것 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 요즘 학생들의 전반적인 학력저하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내가 볼 때 그것은 교육제도와 함께 컴퓨터의 영향에 의한 가치전도의 결과인 것 같다. 과거에는 교실에서 습득한 정보를 두뇌라는 하드디스크에 저장하는 것이 곧 공부였고, 이 하드디스크의 보관능력과 정보추출능력이 곧 학력으로 직결됐었다. 그러다 보니 정보를 가공하는 능력이 개발되지 않아 ‘장롱정보’로 썩히는 지식이 태반이었고, 장기적으로 국가경쟁력의 저하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학생들의 정보 습득경로는 과거와 사뭇 달라졌다. 가장 달라진 것은 정보저장용 하드디스크가 신체 내장형에서 외장형으로 점차 바뀌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지식습득의 효율성과 양적인 면에서 기성세대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과거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인터넷 강국이라고 해서 국가경쟁력이 덤으로 상승하는 효과까지 누릴 수 있을까. 서구에서 개발된 콘텐츠를 오로지 소비만 하는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국내 인터넷 사용자의 증가는 주로 소비자의 증가로 이어질 뿐, 정보를 가공하고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능력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외장형 하드디스크의 용량이 아무리 크다 해도, 주 메모리와 CPU의 성능이 떨어지면 그 컴퓨터는 거대한 잡지에 불과하다.

인터넷 세대가 기성 세대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저 다르다는 것 하나만으로 과거의 폐단을 극복할 수는 없다. 문명의 이기와 강한 일체감을 느끼며 그 속에 대책 없이 빠져드는 것보다는 이기를 창조하는 주인의식을 갖고 그 성능과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해 적재·적소·적기에 사용하는 기술이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박병철 / 서울대 강사·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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