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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시론] 새로운 희망의 연대를 기대하며
[신년특집시론] 새로운 희망의 연대를 기대하며
  • 교수신문
  • 승인 2003.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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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한편의 드라마 같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선거일을 전후한 며칠 동안 필자는 일본 교토에 머물고 있었다. 경북대와 교토대의 공동심포지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10년의 장기침체에 빠져 기가 죽어있는 자기네 일본사람들에 비해, IMF 경제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이번 대선에서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향한 선택을 한 한국 사람들이 참으로 부럽다고 했다. 탈정치화한 일본의 젊은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정치주체로 부상하고 있는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한국사회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들의 지적대로 한국처럼 역동적으로 진보하고 있는 사회는 지금 이 지구상에서 찾기 어렵다. 지난 2002년에 일어난 일들, 예컨대 6월의 뜨거운 여름을 더욱 달구었던 수백만의 월드컵 거리응원,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수십만의 촛불시위, 쌀 개방에 반대하는 수만의 농민시위, 전국 각 지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지방분권운동 등등을 보라.
이처럼 변화와 개혁을 향해 요동치는 역동적인 상황에서 전개된 16대 대선에서는 우리사회의 발전방향을 둘러싼 참으로 중요한 쟁점들이 제기됐다. 정권교체냐 낡은 정치 청산이냐, 전쟁이냐 평화냐, 서울공동화냐 지방공동화냐, 재벌체제 유지냐 재벌개혁이냐, 자유시장이냐 규제된 시장이냐, 성장이냐 분배냐를 둘러싸고 특히 여야 두 유력 후보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낡은 패러다임을 ‘선명히’ 거부하자

이러한 공방을 지켜본 끝에 국민들은 다소 냉전-보수적인 정치기조 아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지향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보다는 평화-개혁적인 정치기조를 가지며 다소 경제민주주의적 경제정책을 지향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를 선택했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무비판적으로 굴종하고 낡은 정치의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푸른 신호가 아닐까 싶다.
이제 격동의 2002년을 보내고 2003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러한 청신호가 희망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새해가 낡은 패러다임이 희망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이번 대선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욕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낡은 패러다임에 대한 거부’가 아닐까 한다. 노무현 후보를 선택한 이번 대선은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갈구하는 국민들이 더 많음을 확인시켰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공약 속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청사진이 흐릿한 상태로 제시돼 있을 뿐이다. 자칫하면 희미하게 있다가 사라질 우려가 있는 매우 취약한 청사진으로 보인다.
대안적 발전모델을 연구하고 있는 경제학도로서, 그리고 지방분권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시민으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한 보다 선명하고 강건한 청사진이 만들어지는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필자 나름의 약간의 제안을 하고자 한다.
먼저 정치영역부터 보자. 청산대상인 낡은 정치는 무엇인가. 지역주민들의 소박한 애향심을 볼모로 잡고 배타적인 지역감정을 부추겨 정권을 잡으려는 지역패권주의 정치, 보스 1인에 의해 사유화되고 독점된 붕당을 통한 패거리 보스정치, 그 보스들에 의한 밀실야합정치, 반대당과 정치적 반대자를 배척하는 배제의 정치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부터 실현해야할 새 정치는 무엇일까. ‘영남당’·’호남당’을 넘어, ‘호남정권’·’영남정권’을 넘어 진정한 국민정당과 국민정권을 통해 지역갈등을 치유하고 서울과 지방간의 격차를 줄이는 지역통합 정치, 주권자인 국민이 각 수준의 직접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는 대중참여정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노사간, 서로 다른 단체간에 대화와 타협을 통해 상생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사회적 합의 정치, 반대당과 정치적 반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이해를 포괄하는 포용의 정치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연대 통해 공동체주의 복원

다음으로 경제영역을 보자. 극복해야 할 낡은 경제는 무엇인가. 족벌경영과 문어발식 경영을 하고 정경유착을 하며 하청중소기업을 수탈하는 재벌들이 지배하는 재벌지배경제, 결정권과 세원이 중앙정부에 있고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서울에 집중돼 있는 중앙집권경제, 각종의 특권·특혜와 독점과 투기에 기초해 불로소득을 획득하는 지대추구경제, 대규모 설비투자와 단순반복노동에 기초해 중저가품을 대량생산하는 대량생산경제,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하고 일자리를 없애며 생태계를 파괴함에도 불구하고 성장만을 강조하는 성장지상주의경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잘 해결된다고 보는 시장근본주의에 기초해 시장에 대한 일체의 국가개입을 배제하는 자유시장경제 등이 낡은 경제의 모습이다.
이런 낡은 경제 대신에 실현해야 할 새로운 경제는 무엇인가. 전문경영인체제를 가진 대기업들과 그들과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중소기업들, 벤처기업들로 구성된 전문기업경제, 중앙정부로부터 자치단체로 권한이 이양되고 서울에서 지방으로 자원이 분산돼 산업자치가 이루어지는 지방분권경제, 창조적 파괴를 하는 혁신적 기업가들이 주도하는 혁신추구경제, 창조적 지식과 정보 그리고 고숙련의 지식노동에 기초해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는 지식기반경제, 성장과 분배가 균형을 취하고 일자리 창출을 우선하는 정책을 실시하며 생태계를 보전하는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경제, 합리적 제도에 기초한 국가의 개입과 시민사회에 의한 민주적 통제를 통해 시장의 불안정성과 불공평성을 줄이는 착근된 경제(embedded economy) 등이 새로운 경제의 비전이다.
끝으로 문화영역을 보자. 우리 사회가 버려야 할 낡은 문화는 무엇인가. 여성차별을 당연시하는 남성중심주의, 학력차별을 조장하는 학력주의, 지방차별을 초래하는 서울중심주의, 대중을 배척하는 엘리트중심주의, 적자생존과 우승열패의 경쟁을 통한 효율성 증대를 최우선시하는 경쟁지상주의, 분배와 복지를 소홀히 하고 성장만을 중시하는 성장지상주의, 학연과 지연을 강조하는 정실주의를 버려야 한다.
이러한 낡은 반인권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생태계 파괴적인 낡은 문화 대신 우리사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문화는 무엇인가. 정부, 기업, 사회 조직의 의사결정과정에 일반국민 혹은 이해관계자들이 대등하게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 시장경쟁에서 탈락하거나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인간답게 살수 있는 최저한의 조건이 보장됨으로써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연대주의, 생태계 보전을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생태주의를 장기적으로 지향하면서 양성평등주의, 실력주의, 지방우선주의를 옹호해야 한다.

<지방분권과 시장경제의 효율성

이처럼 낡은 정치, 경제, 문화를 버리고 새로운 정치, 경제, 문화를 지향할 때 비로소 새로운 발전모델을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낡은 패러다임인 과거 개발독재의 박정희 모델을 넘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대안적 발전모델 실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과 생산적 복지로 요약되는 김대중 정권의 이른바 디제이노믹스(DJnomics)는 대안적 발전모델의 맹아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존의 박정희 모델을 넘어서는데는 실패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경제민주주의와 사회통합에 기여할 공약들을 다수 제시한 바 있다. 특히 재벌개혁과 성장-분배 균형에 기초한 신성장전략, 지방분권개혁 공약은 대안적 발전모델 실현의 주춧돌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엠에이취노믹스’(MHnomics)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방분권적 민주국가와 착근된 시장경제’로 요약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한국에서 지방분권은 가치분배라는 공평성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가치창출이라는 효율성의 관점에서도 요청된다. 그리고 21세기 한국경제의 새로운 성장기반은 지식기반, 복지기반, 지역기반, 동북아 기반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문제의식 아래, ‘지역경제의 총화로서의 국민경제’란 개념에 입각해, ‘지방분권-주민자치-지역혁신’의 결합에 기초한 지역경제의 내발적 발전을 추구하고 ‘참여-연대-생태’의 가치를 지향한다면 노무현 정권5년 동안 대안적 발전모델 실현을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비판적 대화와 사회적 합의의 기틀

이러한 대안적 발전모델을 실현하는데는 국민 각계각층의 노력이 요구되지만 특히 대학과 교수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대학은 낡은 패러다임을 깨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현할 비판의식과 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창출하고 새로운 사회패러다임을 확산시킬 문화혁명의 요람이 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대학은 지식기반경제에서 지역혁신체제 구축의 중심이 되고 지역문화혁신의 주도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할을 하려면 대학의 혁신이 요청된다. 불합리하게 서열화된 불공정 독점체제인 대학체제를 공정경쟁체제로 개혁하고, 고시학원과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을 비판적·혁신적 지식 창출의 원천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여기서 지방대학 육성은 전체 대학의 경쟁력 강화와 지역발전을 위해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다.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명제와 함께, ‘지방대학이 살아야 지방이 산다’는 명제가 타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제 대학의 핵심 구성원인 교수들의 자기혁신이란 과제가 남는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이론과 정책대안 제시에 연구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같은 학문내의 서로 다른 경향의 교수들간의 비판적 대화와 다른 학문들간에 동일 이슈를 둘러싼 다학문적 공동작업을 활성화해야 한다. 다양한 사회주체들과 대화를 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을 위한 사회적 합의 도출에 기여해야 한다. 정부 및 자치단체와의 관계에서는 ‘비판적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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