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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로 재구성한 함석헌 일대기
사건사로 재구성한 함석헌 일대기
  • 교수신문
  • 승인 2003.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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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을 겪다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일명 獅子섬이라 불리는 곳에서 한의사인 아버지와 평범한 어머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함석헌의 가정형편은 평범했으며 당시 평안도는 양반과 상놈의 계급의식이 전혀 형성돼 있지 않은 곳이었다. 열살 때 일제에 나라가 넘어가면서 저항의식이 싹텄다. 덕일소학교 시절부터 그의 삶을 관통하게 된 저항정신은 동네의 뜻있는 학생들이 주권 회복을 외치며 모인 一心團에 가입하게 만들었다.

세계관의 대전환, 3·1운동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일어난 3·1 만세시위와 이 만세운동 참여는 그의 생애에 결정적 전환점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됐다. “3·1운동이 아니었다면 사람 구실 못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고백할 정도다.

평생의 스승을 만난 오산학교 입학
1921년 함석규 목사의 소개로 오산학교에 들어간 함석헌은 평생의 스승 다석 류영모를 만난다. 그를 통해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을 한몸에 체화시키는 삶을 맛보기 시작했다. 류영모를 통해 함석헌은 ‘생각’, ‘참’, ‘생명’ 등을 깊게 생각하는 습관이 서서히 자라났다. 씨알에 대한 사상도 이 때 싹튼다.

일본유학, 관동대진재의 충격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관동대진재를 겪는다. 이 때 일본 군국주의가 이를 기회 삼아 ‘공산주의 혁명’과 폭동의 주범자로 조선인을 몰아 수천명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함석헌은 이를 ‘조센징의 학살’이 아니라 ‘조선의 학살’로 체험하게 된다.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

 
유학시절 함석헌이 직면한 사상적 갈등은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었다. 이 상황에서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은 하나의 빛이었다. 그를 통해 신앙과 민족, 신앙과 애국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하고,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길 결심한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시절 역사, 윤리, 교육에 대한 폭넓은 독서를 통해 종교를 점점 과학적인 자리에서 보게 됐다. 타고르, 칼라일, 톨스토이, 슈바이처의 사상도 접하게 됐다.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
귀국 후 1928년부터 시작된 오산 교사시절 함석헌은 자신의 역사의식과 기독교정신(무교회신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무교회 신앙 동지들과 ‘성서조선’을 발간하고 올바른 역사를 교육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기고하기 시작했다. 보수적 연대기 사관을 뒤엎고 ‘뜻’으로 본 조선역사를, 왕권중심의 사관을 깨고 반역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봤고, 한국사의 세계사적 지평을 고려한 역사철학의 전개가 시작됐다.

저항과 거듭된 투옥의 시작
1923년 관동대진재 때 처음 시작한 감옥살이는 이 시기에 ML당 사건과 연루돼 일주일, 계우회 사건으로 1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1년 옥고를 치르는 등 본격화됐다. 이런 이력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의 행동양태는 ‘소극적 반항’에 머물렀다. 그에게 폭력이란 말은 처음부터 없었고 오직 종교와 교육과 농촌운동을 통해 저항을 펼쳐 나갈 뿐이었다. 귀향해서 농사도 지었지만 광복은 그를 다시 역사의 무대로 불렀다. 해방 정국에서 함석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위험분자’로 분류됐다. 보안대의 감시, 스파이활동의 강요로 함석헌은 결국 1947년 2월 월남하게 된다. 민족고난의 현장에 동참하는 과정을 통해 민중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초기의 무교회 신앙에서도 서서히 벗어나 신앙의 실천적 의미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류영모와의 재회
1947년 서울에서 다석과 재회한 함석헌은 국가주의의 종말을 예견하고 동서양 사상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문명을 구성할 정신, 종교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신앙적으로는 무교회 신앙의 틀을 벗어나 주체적인 신앙을 향해 도약한다. ‘말씀’이란 잡지를 창간하고 종교사상을 심화시키는 한편 퀘이커 교도들을 만나 교류를 시작한다. 1956년 ‘사상계’에 발표한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로 드디어 지성 사회에 함석헌의 이름은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8년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때문에 또 옥고를 치르고, 5·16 당시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발표해 세인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 시기엔 혁명론을 펼치는데, 그의 혁명의 철학은 종교와 혁명의 통일, 비폭력 투쟁을 통한 인간의 혁명이었기에 그는 4·19 혁명에 대해 냉정한 비판의 자세를 취했다.

퀘이커 사상의 본격 수용
장준하 옥중출마를 위한 찬조연설, 야당을 위한 연사, 3선 개헌반대 투쟁위원회,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등으로 활동하며 온갖 협박에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비판사상이 육화된 실천가로서의 모습, 퀘이커 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해가면서 기독교사상의 내적 성숙을 시도해갔다. 이 때 사상적으로 퀘이커의 역사의식, 공동체와 내면의 절대 순수의식, 평화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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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소리' 통한 사상전파
1970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씨알(民의 고유어) 사상을 전개해나갔다. 당시 이 잡지는 ‘사상계’와 함께 이 땅의 비판적 지식인과 씨알들의 대변지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곧 정부의 인가취소로 1년간 법정투쟁을 해야했고, 1980년 폐간조치 당하고 1988년에야 복간된다. 함석헌은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에 동참해 징역 5년을 받는다. 이런 고초 속에서도 ‘씨알의 혁명’, ‘씨알의 꿈’,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 ‘씨알의 공동체’를 강조하는 글을 꾸준히 발표해 씨알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고 씨알사상의 이해 지평을 넓혀나갔다. 1980년대엔 재야에 머물며 씨알사상을 통전적으로 전하는 데 주력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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