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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연속인터뷰-그가 남긴 자리 : ‘토착사회학’ 일군 김진균 서울대 교수
신년연속인터뷰-그가 남긴 자리 : ‘토착사회학’ 일군 김진균 서울대 교수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3.01.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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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바뀌면 연례행사처럼 새로운 출발을 하는 이들과 떠나는 이들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2002년을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나는 학자들을 그저 떠나보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격변하는 한국 근대사 속에서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민주화를 위해 끝없이 소리를 높였던 이들이 차례로 강단을 떠나기 때문이다. 우리신문은 자생적인 학문이론으로, 탁월한 사상가로 또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가르침을 남긴, 올해 강단을 떠나는 퇴임교수들과의 연속인터뷰를 기획했다. 이것이 또 한 번 학계에 성찰의 목소리를 끌어내기를 기대한다.

 
지난달 19일 김진균 교수를 찾아갔을 때, 그는 마지막 수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10여명의 대학원생들이 참석하는 ‘사회변동 연구’ 강의를 마지막으로 오는 2월에 강단을 떠나는 김 교수. 따로 퇴임 행사를 마련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종강하는 얘기” 정도로 준비했다는 그의 마지막 강연은 제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이뤄졌다. 퇴임강연과 이후에 이어지는 학생들과의 뒤풀이에서 김 교수는 지나간 학문 여정을 풀어놓았다.

△마지막 강의를 끝냈는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되니 좋다.(웃음) 1980년에 ‘지식인성명’으로 학교를 떠났을 때는 불안하고 또 사회에 자리를 잡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두려웠는데, 지금은 마음이 편하다. 학교에서 퇴임기념 메달을 줬는데, 뒷면을 보았더니 ‘1968.1.1~2003.2.28’라고 새겨져 있었다. 1968년에 상대 전임으로 온 이후 35년 2개월을 서울대에서 보낸 것이다. 57학번임을 감안하면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거의 평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이번에 서울대 사회대에서 심리학과와 사회학과에서 각각 2명씩 총 4명이 퇴임을 하는데, 4명 모두 입학동기이고, 다른 학교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 적도 없고, 외국에서 공부하지 않은 국내학자들이다. 앞으로는 35년간 교수생활을 한다는 것도, 또 국내에서만 공부한 사람이 한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을까. 현재 비정규직 교수들을 생각하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사회학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토착사회학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전의 학문세대가 일제시대의 학문풍토를 간직하고 있었다면 현실의 문제를 고려하는 사회학으로 방향을 전회한 것인데, 그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나를 두고 ‘토착사회학자’라고 부르는가? 음…그렇게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뭐,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 보다도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입학 당시에만 해도 서울은 우울한 분위기였다. 사회학에서는 농촌사회학, 농촌경제학 등의 전통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나는 산업사회학 쪽에 관심이 많았다.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경제발전이 시작되기도 했거니와, 변화·발전하는 것에 학문적인 관심을 두고 싶었다. 미래지향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당시에 사회학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것은 퇴니스, 파슨즈 등과 같은 구조기능주의였다. 그런데 이런 이론이 도통 현실과 매개되지 않았다. 기업 내에서 노조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도, 계급구조가 혈연관계를 넘지 못하는 것도 많은 학자들은 경제적 구조가 안정되면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의 교수들도 개발형 독재는 불가피하다는 시론을 신문에 쓰곤 했다. 그러나 유신정권 때 경제 발전은 이뤄졌지만, 정치는 오히려 쇠퇴했다. 알고 있는 지식과 현실의 괴리가 큰 시절이었다. 서구의 학문과 자본주의의 정착 아래서 우리의 전통과 문화, 학문을 어떻게 이해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또 ‘전통’과 ‘합리성’의 개념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런 고민들이 방향성을 제시한 것 같다.”

△‘전통’과 ‘합리성’의 괴리를 극복하는 것은 지금도 유효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의 사회구성의 주요 요인은 ‘연줄’이다. 이런 전통적 요소들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계급의식’, ‘계급운동’이었다. 여기서 운동론적 전략으로 ‘민중’개념을 도입했다. 1985년 대우자동차노조의 파업 때야 비로소 계급의식이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넘었다는 생각을 했다. 노동자가 사용자에게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본과 근대국가가 가진 폭력성을 인식해내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구상을 적극적으로 해보는 인식이 새로운 운동의 과제라고 생각된다.”

△교수로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운동가로서도 많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또한 끊임없이 진보적인 방향을 지향하신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습니다.
“처음에는 상과대 전임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상과대 학장은 박이범 교수였는데, 다소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박 교수가 경영학과에 정치·경제·심리·국제법 과정을 가르쳐야겠다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교과과정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운좋게 내가 임용이 됐다. 만약 계속 상대에 있었으면 지금과 같은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대에서는 비전공 교수였으니까 무관심할 수도 있었고, 또 그때는 좋아하는 테니스나 치고 술이나 마시면서 세상과 떨어져 살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웃음) 그런데 1975년에 사회학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한 다리 건너면 알만한 사람들이 각종 사건에 휘말려 대학을 떠나는 과정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후의 활동들도 마찬가지였다.”

△테니스를 좋아했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대학 다니기 전부터 테니스를 좋아했다. 또 잘 치는 편이었다. 서울대 교수들끼리 테니스대회를 할 때, 당시 조교로 있던 김수행 교수와 복식으로 나가면 최강이었다.(웃음) 서울대 캠퍼스가 관악산으로 옮기면서, 학내 시위가 많아졌다. 어느 날 연구실에서 테니스 라켓을 들고 나오는데, 학생들의 시위로 최루탄 냄새가 가득했다. 순간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라켓과 공을 다 치워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는 테니스를 치지 않았다.”

 
△학문의 토착화라는 전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나 역시 국내에서 공부한 사람이지만 당시에는 국내 박사가 거의 없었다. 석사학위만으로도 강단에 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많은 수가 외국으로 학위를 하러 갔다. 그런데 이러다 보면 정작 우리 현실에 맞는 학문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사회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강화했다. 어떤 선생님들은 ‘너희가 아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겠냐’라며 질책하기도 했지만, ‘같이 배우면서 가르치지요’라고 대답했다. 1980년대의 사회과학의 진보적인 경향은 냉전체제를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냉전체제에 찌든, 치우친 인식체제를 극복하는 것 말이다. 아직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가 완전히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 이제는 한국사회를 면밀히 규명할 수 있는 인식론과 이론화가 필요하다. 기계론적인 이해가 아니라 맥락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후학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어떤 개념이든지 하나의 개념을 성립했으면 끝까지 그것을 책임질 것과 판단의 기준을 기층 민중에 둘 것,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우리 세대가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말이 ‘계급’과 ‘민중’이다. 그 이전에는 좀처럼 쓰이지 않던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계급과 민중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낀다. 이론은 실천적 의미의 책임이 따를 때 가치가 있다. 또 판단의 기준이 자기에게 있으면, 본인에게 좀더 많은 것이 용인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해진다. 그러나 판단의 기준이 기층 민중에게 있다면,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어떤 시대나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될 것이다.”

△퇴임 후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아직은 퇴임에 관련한 일정들이 많이 남아 있다. 2~3월에는 홈페이지를 대폭 수정할 예정이다. 학술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2000년 4월에 대장암 수술을 받았는데, 5년 정도 관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당분간 건강관리도 해야 한다. 가지고 있는 자료를 데이터 베이스화 하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각종 강의자료들을 비롯해 이후에 연구하는 학자들이 자료로 쓸 수 있게 남기고 싶다. 또 개인적인 연구실도 준비해야 하고. 장기적인 계획으로는, 1980년대에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많은 접촉을 했었는데 이때 모은 자료를 가지고 지식인 운동사를 쓰고 싶다.”

시기별로 보는 활동사
1937. 11. 20 경남 진주에서 출생
1957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진학
1961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석사과정) 진학, 5·16군사 쿠테타 발발
1964 서울대사회학과 대학원 석사 취득 및 박사과정 진학
1966~1967 숭실대, 경기대, 서울대, 한국외국어대, 고려대, 이화여대 시간강사
1968 서울대 상과대학 전임강사 발령
1980.7.30~1984. 8.27 지식인 성명에 참여, 해직
1983 상도연구실 개소, 해직교수협의회 회원 및 총무간사
1984. 8.31. 복직
1984. 7~1988.7 한국산업사회연구회 회장
1988. 7~1991. 7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
1990~1995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고문, 전노협 후원회 공동대표
1992 학술단체연합회 공동대표
1994 참교육시민모임 공동대표,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 대표,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 정신계층 국민위원회 공동대표
1994~1995 서울대 민교협 회장
1995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초대 이사장, 5·18 내란죄 구속기소 및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전국대학서명교수모임 공동대표, 교육개혁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공동의장
1996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지도위원, 통합전자주민카드 시행반대와 프라이버시권 보호를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전국구속수배 해고자 원상회복지원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민주적 노사관계와 사회개혁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 고문
1997 여성한국사연구소 자문위원,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 21’ 공동대표(준비위 운영위원), ‘서울 국제 노동/미디어 대회’ 공동조직위원장
1998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
1999 사회진보를 위한 민주연대 지도위원, 한겨레신문 노동교육연구소 이사,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원회 공동대표
2001 덕성여대민주화와 사학비리척결을 위한 공동투쟁위원회 상임공동의장, 교수노조 발기인 참여 및 교수노조(준) 후원회 공동대표, 강정구 교수 석방 대책위원회 공동대표
2002 인터넷 국가검열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한총련 합법화를 위한 범사회인 대책위원회 고문, 민주화기념사업회연구소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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