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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년을 맞아] 양에 관한 이모저모
[계미년을 맞아] 양에 관한 이모저모
  • 이은정 기자
  • 승인 2003.01.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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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양은 선함과 순종의 이미지다. 여러 마리가 모여 살지만 세력 다툼 없이 온화하게 풀을 뜯고, ‘뿔이 있으나 들이받지 않으며 발톱이 있어도 할퀴지 않는’ 양은 그래서 ‘평화’의 상징으로 곧잘 인용되기도 한다. 동화나 옛날 이야기에서도 양은 호랑이, 늑대 등의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대상이거나 또는 이들과 대비되는 선한 동물로 그려지곤 한다. 착하게 보이는 사람의 숨겨진 악한 면을 비유하고자 할 때에는 ‘양의 탈을 뒤집어쓴 늑대’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 않는가. 따라서 예로부터 양띠의 사람은 양과 같이 온순하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으로 여겨졌다. 십이지를 꾸준히 연구해온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양의 성격이 순박하고 부드러운 것처럼 양띠도 온화하고 온순해 이 해에 며느리가 딸을 낳아도 구박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라고 말한다.

한자에서도 ‘양’은 상서로운 의미로 쓰인다. 양이 커 아름답다는 ‘美’, 착함의 ‘善’, 그리고 의로움의 ‘義’에 모두 ‘羊’이 포함돼 있는 것이 그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서양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에드문드 스펜서의 전원시에서 어린 양치기는 잔디밭에 누워 양떼처럼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아리따운 아가씨를 위해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예수가 태어났을 때 그 신성한 소식을 동방박사들에게 전해준 것 역시 양을 치는 목동들이었다. 서양의 정신적 토대를 이루는 기독교의 성서에서 양은 속죄양, 즉 ‘희생’의 의미도 담고 있다. 유목 민족에게 양은 재산을 가늠하는 척도로 사용되기도 하며 양고기는 손님에게 대접하는 가장 좋은 음식이기도 하다.

양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상징적 의미는 바로 ‘정직’과 ‘정의’. 반드시 가던 길로 돌아오는 양의 정직하고도 고지식한 습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양띠는 부자가 못된다’라는 우리 나라의 속담은 이러한 습성을 그대로 반영한 대표적인 예다. 양띠인 사람은 정직하고 고지식해 남을 속이거나 이익을 따지지 못해 부자가 될 수 없다는 뜻.

양이 그다지 토착화되지 못한 우리 나라라 양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태조 ‘이성계’에 관한 일화는 매우 흥미롭다. 이성계가 초야에 묻혀 지내던 어느 날 양을 잡으려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양을 잡으려 하자 양의 뿔과 꼬리가 전부 떨어져 나가는 꿈을 이상히 여긴 그는 무학대사에게 털어놓게 되고, 무학대사는 이 꿈을 이성계가 왕이 된다는 길몽으로 해석한다. ‘羊’에서 뿔에 해당하는 ‘’과 꼬리인 곤 ‘ㅣ’ 획을 빼고 나면 ‘王’자만 남게 된다는 것. 이후 조선을 세운 태조는 양 꿈을 길몽으로 여겼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양에 관한 꿈은 행운이 찾아오거나 일이 순조롭게 풀림을 의미해 상서로운 꿈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처럼 ‘길’과 ‘불길’은 공존하는 법. 양이라 해서 결코 좋은 뜻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라남도에서는 새해 들어 첫 ‘양의 날’인 상미일(上未日)에는 출항을 삼간다. 양의 걸음걸이가 방정맞고 경솔하다 보고 바다에 나가지 않는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이 날을 ‘미불복약(未不服藥)’이라 하여 환자라 해도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 약이 제 효과를 내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 모든 일이 순조롭고 평탄하게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은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의 한 해가 아닌 진정한 양의 뜻처럼 온화하고 조화로운 2003년을 위해.

이은정 기자 iris79@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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