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6:45 (토)
책산책 : 『현산어보를 찾아서(전3권)』(이태원 지음·박선민 그림, 청어람미디어 刊)
책산책 : 『현산어보를 찾아서(전3권)』(이태원 지음·박선민 그림, 청어람미디어 刊)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3.01.0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문이 팔딱팔딱 살아 꿈틀거리는 책일수록 맛갈스럽다. 저자의 정성도 정성이거니와, 거기 담긴 문제의식의 압축은 가히 책 전체를 통틀어 白眉라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현산어보를 찾아서’는 그런 책 가운데 단연 손꼽힌다. 세화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저자의 10년 공력이 흠씬 묻어나는 이 책은 3권으로 얼굴을 내밀었지만 내년 봄에 2권을 더 추할 예정이다.

‘현산어보를 찾아서’에는 저자의 우리 과학에 대한 실증적 열정,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 가로지르기, 또 이 열정과 가로지름이 불밝힌 서지학적 성과가 빛난다. 여태껏 ‘자산어보’로 알려진 손암 정약전(1760∼1816)의 ‘현산어보’는 국내 최초의 해양생물학 서적이다. 1814년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원본은 실전된 채 필사본만 전해오고 있다.

3권 1책으로 구성된 이 책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남도의 먼 바다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이 유배 생활을 하던 중 흑산도 근해의 수산동식물을 실지로 조사·채집해 기록한 것이다. 수산동식물 2백여 종에 관한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 등 사실을 상세히 기록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이자, 천주학자로 유명한 정약전의 이 책은 1977년 정문기씨와 1998년 그의 아들 정석조씨가 번역한 이후 이제껏 새로운 관점에서 번역된 적이 없다. 저자 이태원 씨는 이 점을 안타까워하면서 7년을 흑산도를 뒤져 값진 고락의 열매를 거뒀다.

이책에는 기묘한 광경이 엿보인다. ‘현산어보’의 저자인 정약전의 목소리와 2백년 뒤 그를 좇는 교사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어울리는 풍경이다. 실학자인 저자가 박해로 인해 모래먼지 날리는 흑산도로 유배당해, 모래파도소리 벗삼아 주변 환경과 대화하면서 탐구 정신을 열어간 대목을 보자. 나는 어보를 만들어보려는 생각으로 섬사람들을 만나보았다.…그러던 어느날 張德順 昌大라는 사람을 만났다. 창대는 늘 집안에 틀어박혀 손님을 거절하면서까지 고서를 탐독했다.…풀, 나무, 물고기, 새 등 눈과 귀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해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나는 마침내 이 사람을 초대해 함께 묵으면서 어족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내용을 책으로 엮어 ‘현산어보’라고 이름 붙였다. 어족 외에도 바다물새[海禽]와 해조류[海菜]까지 두루 다루어 후세 사람들이 연구하고 고증을 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현산어보 서문 중에서)

그렇다면, 2백년 뒤 그의 후인은 어떨까. “나는 정약전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해서 이러한 책을 만들어내게 됐는지, 당시 우리 학문의 풍토는 어떠했는지, 200여 종이 훨씬 넘는 이 많은 생물들의 진정한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혼자서라도 ‘현산어보’에 얽힌 여러 가지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여행도중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현산어보를 찾아서’의 책을 펴내며 중에서)

결국, 2백년 전 고독한 유배지에서 탐구 정신을 살라 흑산도의 해양생물학지를 주변 사람들과 함께 그렸던 정약전처럼, 오늘의 후인도 흑산도 주민들의 도움에 힘입어 해양생물학지의 미스테리를 온전하게 밝혀낸 셈이다. 4백여 컷의 세밀화, 8백여 컷의 자료 사진 또한 값진 성과다. 1권은 박물학자 정약전을 찾아가는 길이, 2권은 2백년 전 유배지의 해양 생물들이, 3권은 해양생물에서 천문의 지를 관측한 정약전의 과학정신이 각각 테마로 다뤄졌다.

저자가 ‘자산어보’로 알려진 정약전의 책을 ‘현산어보’로 정정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이미 이우성, 임형택, 정민 교수 등이 ‘자산어보’의 ‘玆’를 ‘현’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정약전의 책 서문에도 ‘黑山’을 ‘玆山’으로 사용한다는 구절이 있다는 것, 그리고 ‘설문해자’나 ‘辭源’ 등의 자전에 나와 있듯, 검을 현[玄] 두 개를 포개 쓴 글자의 경우, 검다는 뜻으로 쓸 때는 ‘현’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현산어보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였다.

저자 이태원씨는 여기에 보태, 정약용 스스로가 자신의 시 한 대목(九日登報恩山絶頂望牛耳島)을 두고 “黑山이라는 이름이 듣기만 해도 으스스하여 내 차마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서신을 쓸 때마다 ‘玆山’으로 고쳐 썼는데 ‘玆’이란 검다는 뜻이다”라고 주석을 붙인 사실을 근거로 내세웠다. 그는 또 신안군 우이도에서 구해본 ‘柳菴叢書’라는 책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는 것, 당시 정약용이나 정약전, 그리고 흑산도 사람들이 ‘흑산도’를 어떻게 명명했는지를 밝혀주는 사람의 책인 까닭에서다.

‘유암총서’에서는 “금년 겨울 玄州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라는 대목이 나오며, 이 글의 말미에서는 “玄州書室에서 이 글을 쓴다”라고 하여 구체적인 공간을 밝혔다. 바로 이 현주가 흑산도이며, 흑산을 현주로 읽는다면, ‘玆’는 현으로 읽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설득력있는 주장이다. 정약용, 그리고 그의 제자 이청(저자는 이 사실 관계에 주목, ‘현산어보’가 사실은 정약전이 쓰고, 정약용의 제자 이청이 주석을 단 책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규명했다)이 흑산을 ‘玆山’이라 부른다면, 그리고 그 가운데 서 있는 정약전이라면, ‘玆山漁譜’는 ‘현산어보’가 분명하다는 것. 2백년 전, 정약전의 해양생물학지는 이렇게 해서 자기 이름을 되찾고 새롭게 태어났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