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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읽는 광화문 풍경
문화로 읽는 광화문 풍경
  • 교수신문
  • 승인 2003.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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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의 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그리고 12월의 광화문. 이 두 공간에서의 대대적인 군중 행사는 인터넷을 통한 자발적인 시민 모임으로 시작됐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6개월의 시간적 터울을 지닌 시청 앞 공간은 환희와 굴욕의 메타포로 정치화됐다. 두 공간을 채우고 있는 군중의 욕망 속에는 민족과 국가라는 大敍事가 각인돼 있다. 2002년의 남한 주민은 시청 앞 공간에서 悅樂으로부터 치욕까지의 극단적 내러티브를 경험한다.

나는 이 불균질한 욕망의 틈새에 ‘야인시대’의 뒷모습을 본다. 김두한은 생부와 생모를 일제에게 빼앗긴 고아이다. 그의 부모는 민족에게 영광의 징표였지만, 그는 단지 종로 주먹이었을 뿐이지만, 드라마는 그의 이름을 ‘길거리의 독립군’이라고 명명한다. 그가 일본인들을 거꾸러뜨릴 때마다 시청자들은 통쾌함을 만끽한다. 약소국, 그것도 피식민지 민족의 주먹이 제국의 조직적인 패거리와 담판 승부를 벌여 승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짜릿한 쾌감일 것인가. 그 감동의 크기는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이 꽂아놓은 골든 헤딩골의 그것과 맞먹는다.

월드컵 거리 응원은 참가자들로 하여금 ‘위대한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직접 느낄 수 있게 한 계기였다. 월드컵 거리 응원과 여중생 추모 집회에서 보여준 시민들의 자발적인 응집력을 ‘인터넷 민족주의’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꿈결같던 그 환희가 휩쓸고 간 뒤, 그 자랑스럽던 조국의 휘광 아래 앙상한 속살을 마주보게 된다. 진눈깨비가 날리는 광화문 길거리의 추위는 세상사가 그리 만만치 않았음을, 우리 나라가 그리 자랑스럽지만은 않았음을 뼈 속 깊숙이 각인시킨다. 물론 이 추위는 김두한의 호쾌한 주먹질 따위로는 물리칠 성질이 아니다.

나는 두 개의 광화문에서 민족주의의 대중화를 본다.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던 민족 담론이 이제는 인터넷, 길거리, 라이브 공연에서 번역돼 유포된다. 그러나 우리는 조심스럽게 되물어야 한다. 혹시 우리는 단지 아리따운 두 소녀의 죽음을 통해 훼손당한 민족의 자존심을 보상받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앙마’라는 아이디로 촛불 시위를 제안했던 네티즌이 광화문에서 “우리는 대한민국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며 “이라크에선 미선·효순 같은 아이들 백 만명이 죽었다. 이젠 그들에게도 관심을 갖자”고 연설했을 때, 우리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빗겨 가는 가능성을 본다. 소수자에게 비인간적인 대접을 하면서 강자를 규탄하는 것은 위선적인 민족주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단기에 네 손가락을 잘린 뒤 사장으로부터 어떠한 치료 조치도 받지 못한 중동의 한 노동자가, “한국에는 하느님이 없습니다.”라고 절규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민족주의 속에 하느님이 있는지 좀더 겸손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민족주의는 축구 강대국의 골네트를 가르는 결승골의 승리감이나, 구마적과 싸우다 쓰러진 김두한의 뇌리를 스치는 독립군 장군의 통속적 민족애로 환원될 수 없다.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약소민족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타자화되는 것이 얼마나 굴욕적이고 부끄러운 일인지 길거리에서 체험한 우리는 민족의 이름으로 또 얼마나 많은 마이너리티에게 굴욕감을 안겨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성찰해 보아야 한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수많은 촛불들이 미국 제국주의의 파렴치함을 꾸짖는 몸짓임과 동시에, 우리 속에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또 다른 제국주의적 욕망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촛불 시위에 참가한 이들의 글 속에서 어렵지 않게 ‘축제’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반미 시위’와 ‘축제’ 6월의 월드컵 열기를 12월의 촛불 시위까지 지속시키려는, ‘앙마’의 辯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이번 촛불 시위는 80년대식의 과격한 街鬪 형식을 벗어나 일정 정도 문화 행사의 성격까지 띠고 있다. 그렇다면 작금의 촛불시위는, 마샬 버먼이 브로드웨이 길거리에서 발견한, “춤추며 돌아다니는 맑스”의 유령처럼 하나의 축제 형식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축제는 결연하되 배타적이지 않은 시민 투쟁이어야 한다. ‘앙마’가 “지금, 우리는 자꾸 좁아지고 있습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넓어져야 합니다”라고 호소한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박명진 / 중앙대 강사·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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