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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공간문화 연구를 위한 사유의 연장통
비판적 공간문화 연구를 위한 사유의 연장통
  • 이상길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 승인 2017.10.2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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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마르크 오제 지음 | 이윤영·이상길 옮김 | 아카넷 | 216쪽 | 13,000원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의 대표작인 『비장소』는 1992년 출간 직후부터 이미 공간 관련 연구와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참고문헌으로 자리 잡았다. 이 책의 핵심적인 기여는 제목이기도 한 ‘비장소’ 개념의 창안과 체계화에 있다. 이 책에서 오제는 ‘이동(교통), 소비,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가리키는 새로운 용어로 비장소를 제안한다. 자동차, 고속철, 비행기 같은 교통기관, 고속도로, 역, 공항 같은 이동을 위한 각종 시설, 호텔이나 리조트, 수용소 같은 일시적 체류 장소, 백화점, 쇼핑몰, 대형마트 등의 소비 공간, 그리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같은 미디어 네트워크가 이른바 ‘경험적인 비장소들’이다. 다소 이질적인 듯 보이는 이 장소들은, 오제에 따르면, 그 성격상 전통적인 장소와 대척점에 있다는 분명한 공통분모 위에서 한데 묶인다.

인류학적 의미에서 장소란 역사가 새겨지고 관계가 만들어지며 정체성에 개입하는 곳이다. 오제가 개념화하는 비장소는 이렇게 ‘유기적 사회성’을 빚어내는 전통적 장소의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는 장소다. 부정적으로 규정하자면, 비장소는 역사를 살게 하지 않고 관계를 만들어내지 않으며 정체성의 구성에 기여하지 않는다. 공항이나 호텔, 쇼핑몰의 늘 새 것인 듯 매끈한 공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며 영원한 현재에 깃든다. 거기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또 스쳐 지나가지만 별다른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그곳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띠지 않는다. 나만의 고유한 장소가 되기엔 그것이 종종 너무 많고 비슷비슷해 쉽사리 대체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곳을 그저 통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기껏해야 잠시 머물 따름이다.

 

비장소와 ‘고독한 계약성’의 만연

이러한 비장소의 일반화가 초래하는 결과는, 오제가 보기엔, ‘고독한 계약성’의 만연이다. 공동의 기억과 경험, 이야기와 상호작용을 통해 사람들 간의 긴밀한 유대를 낳는 장소와 달리, 비장소는 거기 접근할 수 있는 일정한 능력(시민권, 면허증, 구매력, 접속 ID 등)을 가진 개개인을 운전자, 탑승객, 고객, 소비자, 시청자 같은 추상적 범주 아래 제각기 호명한다. 이때 상징체계는 공유된 전통과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매개로 구축돼가기보다 최소한의 공통언어에 의존한 지시어, 안내문, 광고, 슬로건 등의 형식 속에서 일방적으로 부과될 따름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풀려난 익명적 개인들은 자유로우면서도 고독하고, 제각각이면서도 남들과 유사하다. 결국 비장소가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물리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존재론적 역설 속에 놓이게 됐다는 뜻이다.

1935년생인 오제는 원래 아프리카 전문가로 학문적 이력을 쌓았으나, 1980년대 중반부터는 동시대의 자문화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로 눈을 돌려 이른바 ‘가까운 곳의 인류학’을 개척해나갔다. 그는 특히 1980년대의 달라진 (서유럽) 대도시 정경에 주목해 『비장소』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정경의 변화는, 오제의 관찰로는, 근대성으로부터 초근대성으로의 ‘거대한 전환’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러한 이행은 시간의 가속화와 역사의 방향 상실, 지구 공간의 축소와 비장소의 증가, 그리고 규범적·해석적 준거체계의 다양화로 인한 개인주의의 강화가 맞물리면서 일어났다. 달리 말하면, 시간과 공간, 주체 차원의 어떤 극적 변화 양상들은 우리가 더 이상 근대성 아닌 초근대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오제에 의하면, 비장소를 포함해 우리가 새롭게 경험하는 ‘과도함’의 현상들은 과거와 현재의 비교적 조화로운 공존으로 특징지어졌던 근대성의 발전 과정이 질적인 단절로까지 나아간 세계의 징후라 할 수 있다. 인류학자가 보기에, 우리가 사는 ‘지금’은 역사 속의 현재, 과거와 이어진 현재, 과거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현재가 아니다. 이는 비단 역사에 대한 감각뿐만 아니라 공간의 작동 논리, 개인의 의미구성 실천에서도 뚜렷이 나타나는 새로운 전환이자 이행이다. 오제는 이러한 초근대성의 출현에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전 지구화 추세, 그리고 각종 교통·통신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사반세기 전에 오제가 그 낌새를 포착했던 거대한 사회적 변화는 이제 부인할 수 없는 확고한 현실로 자리 잡았다. 세계 곳곳에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비장소의 성장과 증식은 그 단적인 예다. 우리는 이미 대부분의 생활을 비장소에서 영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대 공간과 문화 관련 연구들에서 『비장소』가 끊임없이 소환되는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인류학 전공자도 아닌 역자들이 『비장소』의 번역에 감히 나서게 된 것 또한 국내에서도 이 책의 쓸모가 커져만 가는 상황에서 원전에 대한 접근은 제한돼 있는 실정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역자들로서는 한국어로 옮겨진 이 책이 장차 여러 수준에서 폭넓은 쓰임새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우선 『비장소』는 우리 사회에서도 계속 확산돼 가는 경험적 비장소들의 연구에 기본적인 참조점을 제공해준다. 오제가 초안을 제시한 비장소의 개념과 특성은 공항이나 호텔, 대형마트 등의 실제 공간은 물론, 인터넷과 가상공간, 디지털 미디어 같은 기술적 대상들의 체계적인 분석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비장소』는 현재 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다양한 사회 현상과 갈등의 이해에도 중요한 개념 틀을 제시한다. 오제는 비장소를 명확한 경험적 실체로 다루면서도, 장소/비장소 구분의 모호하고 유동적인 성격을 시인한 바 있다. 즉 정의상 비장소인 공간이라 할지라도 공간 내의 행위자들이 그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장소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장소』의 논의로부터 ‘장소화’나 ‘비장소화’ 같은 개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내고, 최근 첨예한 공공 의제로 떠오른 ‘장소투쟁’을 새롭게 조명해볼 수도 있을 법하다.

 

한국사회 공간 문제 파악에도 시사점

예컨대, 대도시 곳곳의 젠트리피케이션이라든지 대다수 지역의 관광지화, 고시원과 편의점의 급증, 미디어 스펙터클의 범람 등은 우리 주위의 일상 공간이 극단적인 ‘비장소화’ 경향 속에서 재편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이나 관광산업의 성장은 대개 전통적인 장소들을 비장소들로 대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집이나 동네 상점들마저 장소로서의 의미를 잃은 채 비장소로 변모해가는 추세와 더불어,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예기치 못한 여러 가지 문제를 유발한다. 비장소로서 인터넷과 SNS의 발전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러한 진단은 토건자본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에서부터 자발적인 ‘마을 만들기’, 온라인 공동체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장소화’의 길항력 또한 고려하여야 한다. 『비장소』는 이처럼 ‘장소화와 비장소화의 변증법’이 빚어내는 역동성 속에서 우리 사회의 공간 문제를 심층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나 더 덧붙일 것은 『비장소』가 예술작품의 창작과 비평에도 다채로운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건축이나 공공미술, 장소특정적 예술 등이 동시대 미학 담론과 실천의 중심축으로 부상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주된 이유는 오히려 비장소의 확장에 뒤따르는 어떤 정서구조가 예술가를 위시한 많은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과 상상세계를 은연중에 사로잡아버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우연일 테지만, 우리 사회를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는 디스토피아로 그려낸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은 온통 비장소의 풍경으로 가득 차있다. 역, 여관, 수용소, PC방, 자동차, 지하도, 모델하우스 같은 ‘장소 아닌 장소들’을 노숙자, 가출청소년, 좀비 등 집을 잃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유령처럼 배회하는 것이다. 『비장소』는 이처럼 예술가의 시대감각, 혹은 비평가의 해석지평에도 새로운 빛을 더해줄 수 있는 책이다. 이 비판적 사유의 연장통이 앞으로 여러 분야에서 널리 활용될 수 있길 기대한다.

이상길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파리5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과 문화사회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함께 지은 책으로 『커뮤니케이션의 확장』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헤테로토피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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