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비쳤지만 그래도 ‘근대의 출발’로 볼 수 없는 이유
‘빛’은 비쳤지만 그래도 ‘근대의 출발’로 볼 수 없는 이유
  • 교수신문
  • 승인 2017.10.2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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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철 한성대 교수가 보는 「종교개혁의 시대적 의미」

교회개혁운동에서 교육은 중요한 사회적 현안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통교회의 문제가 부적절한 교육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했고, 개혁운동의 사회적 정착을 위한 장기적 수단을 교육에서 찾았다. 교육개혁은 곧 교회개혁의 교두보였다. 교육과 관련해 종교개혁기에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아동교육의 확대였다. 1520년 아동교육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드러낸 루터는 이 촉구를 통해 향후 독일 루터파 지역에서 전개될 심상치 않은 변화를 예고했다. 당초 아동교육확대의 목적을 성경읽기에 국한했던 루터는 1530년에 아동교육이 미래의 교회지도자와 국가동량을 배출하는 밑거름이라며 확연히 달라진 교육관을 피력했다. 아이들을 훌륭하게 길러내는 일은 내세와 현세를 책임지는 교회와 국가의 존립에 중차대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어린이교육에 대한 루터파의 관심과 거듭된 호소는 현실로구체화됐다. 1524년 4개 도시(마그데부르크, 노르트하우젠, 할버슈타트, 고타)에 라틴어 학교가 신설되면서 시작된 학교건립의 행렬은 대대적으로 이어졌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절실한 목표

종교개혁이 독일교육사에 세운 또 하나의 이정표는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의 등장이다. 김나지움 도입은 그야말로 독일교육제도의 획기적 발전이었다. 종교개혁은 아동교육에 하나의 쾌거였다. 비록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지만, 문맹퇴치와 만인교육은 프로테스탄티즘이 추구한 절실한 목표였다. “백성들에게 자식을 학교에 보내도록 강제하는 일은 세속정부의 책무”라는 루터의 호소는 다름 아닌 공교육의 출범을 알리는 것이었다.

16세기 유럽인들이 교회개혁운동의 혁신적 성격을 가장 가시적으로 체감한 영역은 아마도 성직자의 결혼일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이 성직자 결혼을 요구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성경적·교리적 근거가 제시됐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개인의 선택사항으로 남긴 독신을 의무화하는 것은 성경에 저촉되는 오류이고, 일종의 선행이었던 육체적 순결은 더 이상 구원과 무관하며, 세속인에게 허락된 결혼을 성직자에게 금하는 것은 만인의 영적 평등을 지향한 만인사제주의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목회의 측면도 고려됐다. 가족과 동고동락하는 성직자가 자녀의 양육, 부부간의 갈등 등 평신도의 가정에서 불거지는 일상적 문제들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으며 적절한 조언과 걸맞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명분은 성욕의 봉쇄에서 빚어지는 생리적 고통과 성직수행의 어려움이었다. 한창 나이에 금욕의 공간에 들어간 후 타오르는 성욕 때문에 여러 번 밤잠을 설쳤다고 고백한 루터는 “인간의 연약함은 순결한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혁신적으로 받아들여진 성직자의 결혼

16세기 중반 루터파 설교가로 이름을 떨친 마테시우스는 반려자를 맞아 가정을 꾸리는 일은 아담과 이브를 결합시킨 신의 의도에 순응하는 것이고, 자녀를 낳고 기르는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절대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며, 이러한 순응과 복종은 최고의 복락을 제공한다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가정은 신앙과 인격수양을 위한 최고의 배움터로 부각됐다. 자녀는 부모공경을 통해 신에게 순종하는 자세를 터득하고, 부모와 자식은 서로의 사랑을 통해 인간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체득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개혁가들에게 가정은 신앙을 성숙시키는 요람이자 바람직한 인성을 북돋우는 보금자리였다. 현대서양의 가정 중심적 문화는 종교개혁에 많은 은덕을 입었다.

미완의 개혁: 종교개혁과 여성

부정적 성 이데올로기를 고수한 중세교회는 혼외성교는 물론 인간생활의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인 배우자 간의 섹스마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적극적으로 통제했다. 부부간 섹스의 목적은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오로지 자식생산으로 제한되었고, 심지어 성행위의 시기와 시간 그리고 복장과 체위까지 규제됐다. “육체적 결합은 잠자고,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는 것보다 더욱 필요한 일이다.” 전통으로부터의 일탈이 역력한 루터의 선언이다. 나이 마흔을 넘겨 십육 년 연하의 전직수녀 카타리나와 혼인한 후 슬하에 여섯 자식을 두었던 루터의 이러한 생각은 부부의 성교를 연간 50일 안팎으로 제한한 과거와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성은 부부의 애정과 유대감을 증진시키는 데 얼마든지 선용될 수 있다는 인식은 종교개혁의 또 다른 근대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개혁의 열기가 섹슈얼리티의 영역에도 뚜렷이 감지된다.

종교개혁은 여성교육의 신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제 여성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는 존재로 부상했다 종교개혁이 여성에게 제공한 가장 큰 혜택은 아마도 이혼과 재혼의 법제화일 것이다. 종교개혁은 그동안 한 남자와의 만남을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여기고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여성에게 서광만 비췄다고 속단할 수 없다. 여성을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취지로 강행된 수녀원의 폐지는 한편으로는 여성의 자아구현에 큰 악재였다. 중세의 수녀원은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한 배움의 공간이었고, 남편의 폭력과 출산의 위험 그리고 자식양육의 부담에서 자유로운 안전지대였으며, 무엇보다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던 성직세계로 나아가는 단 하나의 통로였다. 종교개혁은 수녀원을 탈출한 카타리나 같은 여성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었지만 수녀생활을 동경하거나 고집한 또 다른 여성들에게는 차라리 저주였다. 종교개혁가들은 여성을 수녀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자처했지만, 그들이 이상화한 가정은 여성에게 또 하나의 수녀원이었다. 20세기 중반 국제적 명성을 구가하며 종교개혁 연구지평을 넓혔던 베인톤은 “인간생활에서 종교개혁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역은 가정”이라고 평가했다. 뛰어난 통찰이다. 그러나 가정의한 주체인 여성에게 종교개혁은 명암이 공존하고 득실이 교차하는 미완의 개혁이었다.

 

 

박준철 한성대·역사문화학부
오하이오대에서 서양중세사(종교개혁사)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 「16세기 독일 종교개혁의 역설: ‘영적 자유’와 민중규율화」, 저서로 『서양문화사 깊이읽기』 등이 있으며 현재서양중세사학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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