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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의 자율성과 효율성
연구과제의 자율성과 효율성
  • 진영미 선문대 학술연구교수
  • 승인 2017.10.1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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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 진영미 선문대 학술연구교수

육십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까지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지원 받은 연구과제가 적지 않다. 하나같이 공동연구과제였다. 그런데 이번엔 개인연구과제인 학술연구교수에 지원했다. 몇 해 전, 딸이 결혼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아이를 갖지 않아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출산에 대해 별다른 계획이 없음을 알았다. 가장 큰 원인은 직장 생활이었다. 딸의 시아버님이 장손이고 시숙이 있긴 하지만, 딸 하나만 낳고 더 이상 낳지 않는 상황에서 딸의 반응은 친정엄마인 나에겐 적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인구절벽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우리 가족 또한 피해갈 수 없구나’라는 생각에 안타까움마저 더해졌다. 그리하여 나는 용기를 내어 딸에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서라도 아이를 키워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이를 가지라고 했다.

그렇게 2년 전에 외손주를 보게 됐다. 반가웠고 기뻤다. 하고 있던 공동연구과제도 마침 마무리 단계여서 다행이었다. 손주를 정성껏 보살폈다. 그런데‘책은 조금 멀리하고 손주 키우며 가정에 충실하자’는 다짐과 달리, 틈만 나면 컴퓨터에 앉아 원전을 뒤적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고민 끝에 공동연구과제는 자칫 다른 연구원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으니 자제하고 개인연구과제를 하나 신청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작년부터 학술연구교수과제를 수행하게 됐다.

작업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돌도 채 안된 손주를 어린이집에 맡겼다. 손주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만사 제쳐놓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을 했다. 손주가 자는 시간 역시 나의 작업 시간이었고, 어쩌다 손주가 외출 중일 땐 그나마 조금은 여유롭게 작업을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손주가 없는 주말에는 한 번 책상에 앉으면 밥을 먹는 것도, 잠시 쉬는 것도 잊은 채 작업을 하게 된다. 식사시간이나 취침시간을 넘기는 것은 다반사다. 장시간 작업으로 인해 눈이 따가울 때나 집중력이 떨어질 때야 비로소 ‘아, 내가 너무 오래 앉아 있었구나’를 알게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처럼 요즘 나는 시간을 갈구하면서 산다.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한두 가지가 아닌 집안일을 하면서 손주 돌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손주를 너무 일찍부터 어린이집에 맡기는 바람에 딸에게 그리고 손주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손주와 함께 있을 때면 정성껏 보살피느라 잠시도 앉아 쉴 틈이 없다. 내 자신에 대한 치장을 잊은 지는 오래 됐다. 언제 미장원에 다녀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물론 가끔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의문을 던질 때도 있지만, 어느새 그 생각마저도 사치라고 여긴 채 넘겨버린다.

학술연구교수 연구과제는 공동연구과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섭 받거나 구속 받는 것이 별로 없어 자칫 연구에 태만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자유롭기 때문에 작업의 능률을 극대화시킬 수도 있다. 정해진 시간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허여되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수십 권의 한문 원서를 뒤적여야 하는 나의 연구과제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에 속도감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연구과제의 자율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과제의 자율성으로 인해, 학문하는 즐거움과 손주 키우는 재미를 동시에 맛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솔직하게 고백하면, 연구과제가 있어 손주를 잘 키우게 되고, 또 손주가 있어 작업에 흥이 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즐거움의 대가로 육체적 고됨을 감수해야만 하지만.

오늘도 나는, 손주가 올 때쯤이면 키보드와 마우스를 숨겨야만 한다. 눈치 빠른 손주에게 작업하다가 들키면 여지없이 책상에 앉혀 키보드와 마우스를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손주 몰래 몰래 작업을 해야만 해서일까! 때론 연구과제와 밀애를 나누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진영미 선문대 학술연구교수
성균관대에서 국어국문학 전공으로 박사를 했다. 주로 한문학을 연구하며, 고문헌의 인명 표기 유형과 특성에 관한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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