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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강단에 선다면
다시 강단에 선다면
  • 이상옥 서울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17.10.1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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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이상옥 서울대 명예교수·영문학

나는 40년에 걸친 교직생활 내내 ‘가르치는 일은 곧 배우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 뿐, 그 어떤 고매한 교육이념도 표방한 적이 없다. 하지만 강단에 오를 때마다 항상 되새기던 모토는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가르친 영문학 분야에서는 교육의 성과가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읽히는 텍스트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사실 이 믿음은 나의 학창시절에 이미 싹 트고 있었다. 해방 후의 혼란기와 뒤이은 한국전쟁 때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거친 후 휴전 직후의 그 어려웠던 시절에 대학에 다니면서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절감했고, 늘 자구책 삼아 독자적인 독서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훗날 교직에 들어섰을 때도 당연히 나는 학생들에게 되도록 많은 양의 텍스트를 읽히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학기마다 수강생들의 리딩 리스트에는 그들이 감당하기에 만만찮을 만큼의 텍스트가 올랐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만족할 만한 영어구사력을 함양하지 못한 채 대학에 들어왔기 때문에, 강의실에서는 텍스트의 주요 부분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래서 나는 문예작품 고유의 내재적 가치를 분석·평가하고 감상하는 데 치중할 여유가 없었고, 수강생들의 의견 발표를 권장하거나 토론을 유도하는 일도 소홀히 했다. 물론 나는 누구보다도 빈번히 학생들의 과제물을 받았고, 그것을 읽고 고쳐서 되돌려주는 일만은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 학생과 나 사이에 사사로이 오가는 소통이었을 뿐, 여럿이 함께하는 의견발표나 토론에 비유될 수 없었다.

많은 분량의 텍스트 읽히기가 지닌 또 하나의 맹점은 작품 외적인 요소들을 강의에서 거의 배제해야 했다는 것이다. 내가 재임하던 20세기의 마지막 30년에는 많은 생소한 문예이론들이 난무했고 학생들은 거의 좌파이론에 경도했는데, 나는 학생들이 특정 이론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했을 뿐 많은 이론에 노출되도록 이끌지 않았다. 이는 무엇보다 내 자신이 그 많은 이론들을 신봉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섭렵에도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교수방식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기에 재임 마지막 10년간은 대학원 과목을 사양하고 학사과정 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내가 만약 다시 교단에 설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의견이랍시고 표명하자니 머쓱해지지만, 그런 대로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선, 나는 재임 마지막 10여 년간 학사과정을 대폭 교양교육 과정에 포섭하려는 노력을 하다가 번번이 좌절을 겪은 바 있는데, 근년에는 학문 간의 융합이나 통섭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고 있으므로 학사과정을 통합해 대폭 교양교육 과정에 편입시키자는 노력을 다시 들여 보고 싶다. 그리고 수강생들이 영문학을 단순히 외국문학으로만 여기지 말고 인문학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면서 그 속에서 삶과 사회를 보는 안목까지 기를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음으로, 텍스트의 중요 부분을 읽고 풀이하는 데 들이던 시간은 되도록 줄이고 작품 고유의 의미나 가치를 평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싶다. 학생들로 하여금 주요 문예이론에 비추어서 또는 문학사나 비교문학의 시각에서 작품을 조명해보도록 인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과제나 자유 주제의 발표를 적극 권장하고 그 발표가 의미 있는 토론으로 이어지게 할 것이다. 이런 학구적 소통의 피드백은 ‘가르치는 일은 곧 배우는 것’이라는 내 오랜 소신의 타당성을 재삼 확인케 하는 흐뭇한 효과까지 자아낼 것이라 믿는다.

 

이상옥 서울대 명예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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