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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으로의 초대] 밀양 연극촌 '촌장’이윤택
[지면으로의 초대] 밀양 연극촌 '촌장’이윤택
  • 김정아 기자
  • 승인 2001.01.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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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과 전통을 매개로 20세기의 인문적 가치 대중화"

"20세기 서울의 흐름을 쫓아가지 않기 위해 ‘피난’을 왔습니다. 아직도 공동체를, 그리고 민중 축제를 말할 수 있음을 이곳에서 배웠습니다.”

지난 99년, 연극연출가 이윤택 씨는 단원들을 이끌고 연극의 불모지 밀양으로 내려왔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지금, 밀양은 영남의 연극인들이 지역 주민과 만나는 지역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 씨가 주말마다 무대에 올리는 작품은 연극을 접해보지 못한 밀양 주민을 위한 것이다. “이들은 연극을 보고싶어 할 뿐 아니라 연극을 바라보는 나름의 관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전통인형극도 재밌어 하지만 지극히 실험적인 작품도 그다지 낯설어하지 않습니다.” 대중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대중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신념은 변화된 조건 속에서 연극이 살아남기 위한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21세기 연극의 성패는 중산층 관객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달려있다. 소극장에서만 가능한 실험적인 작품도 필요하지만, 일반 관객을 염두에 둔 대극장 연극도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사라져 가는 20세기적 가치를 대중화함으로써, 중산층의 혼란과 환멸에 해답을 제공하는 연극이 돼야 합니다.” 이러한 이 씨의 진단에는 “관객도 없고, 비평적 지원도 없고, 연극인 사이의 연대도 없는” 작금의 연극계에 대한 깊은 우려가 깔려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이 씨는 올 여름 밀양연극축제를 기획하고 있다. 고전하는 젊은 연출가들이 참가할 워크샵과 세미나를 마련하는 한편으로 이들이 연극을 만들어 서울을 공략할 수 있는 터전을 닦겠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구 13만의 밀양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서울에 있었다면 상상할 수 없었을” 일들을 가능케 하고 있다.

밀양행 이전에도 그의 이력은 기존의 중심을 거부하는 대담함으로 특징지어진다. 등록금으로 연극을 만들다 망하는 바람에 서울연극학교(지금 서울예대)를 중퇴한 것이나, 신문기자 퇴직금을 털어서 극단을 만들고 소극장을 마련한 것은 그 중의 몇 가지 예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의 중심을 거부한 그를 세계가 인정하기 시작했다. 세계적 권위의 수많은 연극제와 극장이 그의 작품을 초청한 바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작품은 두터운 관객층을 확보한 ‘흥행보증수표’이다. 그의 밀양행에 동참한 연희단 거리패는 “연극해서 먹고사는 유일한 직업 극단”이라고.

이윤택 씨는 자신의 연극이 관객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이유를 서양의 고전과 우리의 전통에 주목하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파우스트에서 햄릿, 리어왕, 맥베스를 아우르는 그의 고정 레파토리는 해가 거듭될수록 완성도를 높여가며 정기적으로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새로운 레파토리 발굴도 계속되는데, 올해는 ‘한여름밤의 꿈’을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다. 묵직한 고전의 재해석과 함께 이 씨가 중시하는 것은 전통극의 현대적 복원이다. 특히 이 씨는 굿판이나 제례의식을 통해 전통적 음악극의 복원을 시도한다. 때로 그의 음악극은 ‘뮤지컬’로 분류되지만, 브로드웨이를 흉내낸 미국식 엔터테인먼트는 아니다. “우리 극은 樂歌舞가 원칙입니다. 판소리가 바로 우리 식의 음악극입니다.” 89년 초연이래 10년 이상 무대에 올려지며 평균 객석점유율 90%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던 ‘오구’ 역시 연기와 입담과 춤과 노래가 어울린 음악극 형식을 따른다. 초연 당시에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대학의 교양국어 텍스트로 사용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올해는 프랑스어로도 번역될 예정이다. 이 씨는 올해 ‘오구’를 가지고 영화감독으로 데뷔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최근 이 씨가 ‘대박’을 터트린 또 하나의 작품 ‘어머니’ 역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 있다. 모친의 구술을 토대로 했다는 이 씨의 창작극 ‘어머니’에 관객들은 상당한 호응을 보였는데, 작가는 그 이유를 “문맹인 어머니”의 육성을 통해 “관념의 덧칠 없는 우리말의 리듬과 장단과 박자”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윤택 씨는 21세기를 외면하지 않듯이, 서울도 포기하지 않는다. 지난 12월 성균관대 겸임교수로 임용돼 연기과 시험을 감독하기도 했던 이 교수는 우리나라 공연예술의 미래가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예전과 달리, 연기를 지망하는 학생들의 지적 역량도 상당하고 태도도 착실합니다. 정치경제 분야에 실망한 젊은 친구들이 점점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겠지요.”
김정아 기자 anonio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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