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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弊에 집착하는 교육부
積弊에 집착하는 교육부
  •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 승인 2017.10.17 17: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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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논술·면접에서 2년 연속 교육과정을 위반했다는 3개 대학에 총장 징계를 요구하고, 입학정원과 지원금을 축소할 모양이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범위와 수준’을 벗어난 입시를 금지한 2014년의 ‘공교육정상화법’에 따른 조처라고 한다. 그런데 주관식일 수밖에 없는 논술·면접 문제의 교육과정 위반 여부는 교육부가 밀실에서 일방적으로 가려낼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교육부가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는 국정농단 시절의 積弊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학도 과도한 선행학습의 폐해에 공감한다. 그런데 무엇이 선행학습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내용의 경계는 무 자르듯 명쾌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념들의 位階가 분명하지 않은 국어·영어·사회에서는 교육과정의 범위와 수준을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개념의 位階가 비교적 명확하다는 수학·과학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08학년도 수능 물리 과목에서 불거졌던 논란에서 분명하게 확인된 사실이다. 물질의 ‘열용량’을 가르치라는 교육과정의 요구는 單原子 분자에만 한정돼야 한다는 것이 교육과정평가원의 일방적인 해석이었다. 그러나 한국물리학회의 의견은 전혀 달랐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도 多原子 분자의 열용량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근본적으로 왜곡된 사실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물리학회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훨씬 더 큰 설득력을 발휘했다.

주관식인 면접·논술의 경우에는 사정이 훨씬 더 복잡하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전문 개념을 이용한 완벽한 ‘전문가적’ 답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면접·논술을 치르는 학생들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범위와 수준에서 제시하는 답도 충분히 평가할 수 있다. 주관식 문제의 교육과정 위반 여부는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교육부가 문제만 보고 출제자의 의도를 일방적이고 자의적으로 억측?추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학이 의도적으로 공교육정상화법을 무시한 것도 아니다. 논술·면접을 실시하는 모든 대학이 작년의 법 개정에 따라 ‘선행학습영향평가위원회’를 구성하고, 현직 고등학교 교사들과 함께 선행학습 유발 가능성을 꼼꼼하게 심의했다. 법이 요구하는 절차에 따라 신중하게 출제한 대학의 입장에서는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내려버린 위반 판정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대학의 성실한 소명에 대해 단 한 마디 해명도 없이 무작정 ‘불수용’ 처분을 해버렸다. 권위주의 시대에나 볼 수 있었던 퇴행적 갑질이다. 민주사회에서 누구에게나 보장된 변론권을 인정하지 않는 행정조치는 교육부의 횡포다.

교육부가 교육과정 위반을 판단하는 원칙·기준·절차를 제도적으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위반 판정의 사유도 구체적으로 공개해야 하고, 대학의 성실한 노력과 소명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교육과정위원회’의 인적 구성도 당당하게 밝혀야 한다. 밀실 행정은 무능의 상징이다. 정치적 성향이 강한 시민단체가 비공개 자료까지 들고 나와 공개적으로 교육부를 압박하는 것도 명백한 월권이다.

이제 교육부가 대학에 무소불위의 공권력을 휘두르던 갑질의 시대는 끝났다. 과목별 학력고사로 변질돼 ‘문·이과 통합교육과정’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짝퉁 수능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수능 문제의 교육과정 위반도 심각한 상황이다. 교육부가 괜한 트집으로 대학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입학정원과 지원금 감축의 피해는 아무 잘못도 없는 내년도 응시자와 합격생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교육부와 교육단체들의 적폐부터 청산해야 대입 정상화가 가능하다.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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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성 2017-10-18 16:04:03
공감합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은 교과서에 쓰여 있는 것 이외에 어떤 과학적 해석이나 상상을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교육부 관계자들의 생각인 듯 합니다. 한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