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 투쟁만이 ‘진보’ 아니다…새 세대 진보 지식인의 조건
강경 투쟁만이 ‘진보’ 아니다…새 세대 진보 지식인의 조건
  • 교수신문
  • 승인 2017.10.1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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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김명석의 필로폴리스_ 5. 시민 진보와 전략 시민

시민은 도회지에 사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도시화와 시민화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한 사회가 시민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은 곧 그 사회가 문명화되는 것을 뜻한다. 영어의 ‘시티’는 라틴어 ‘시비타스’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은 ‘시비스’, 오늘날 말로, ‘시빌’이라 불리는 이들이 자기 권리를 갖고 누리는 상태, 그러한 이들의 모임, 그들이 사는 곳, 그들의 모임과 지역이 갖는 집단 권리 등을 뜻한다. ‘시티’는 우리말에서 ‘나라’와 가장 잘 어울린다. 나라는 마을과 달리 사람들의 힘이 모여 있다. 나라는 사람들의 모임이면서 또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힘이며 그 힘이 미치는 장소이다.

시민이란 그것이 폴리스든, 시티든, 마을이든, 나라든, 자기 공동체가 위태로울 때, 다른 이의 명령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무장해 그 공동체를 지키는 사람들을 말했다. 그는 전쟁에 졌거나 큰 빚 때문에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지 않은 사람이다. 시민은 곧 자유를 지키는 사람이며, 자유를 권리로 갖는 사람이며, 자유로운 사람이다. 국경선은 그런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닐고 살 수 있는 경계선을 말한다. 세계 시민은 지구 전체를 자신의 자유로운 무대로 여기며, 어느 나라 사람이든 그를 동료 시민으로 인식한다.

여기 한반도에서도, 고조선 아니 그 이전부터 시민들이 있었다. 노비의 수가 줄어들고, 시민의 권리가 커지는 역사를 겪었다. 갑오농민혁명과 삼일만세운동을 거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선포됐고, 이후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0민주항쟁, 지난해 촛불혁명까지 지금 여기 사는 사람들이 시민임을 선포하고, 시민 정신을 더 굳게 갖고, 시민의 권리를 행사했다. 민주주의란 이들 시민이 나라의 모든 주권을 갖는 체제를 말한다. 다른 나라의 역사도 그렇듯이, 우리 역사도 민주주의가 확대돼 온 역사였으며, 곧 시민 진보의 역사였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형성했고, 이 점은 헌법 전문에 새겨 있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확실히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반하는 반동 정권이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은 시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국군과 국정원을 동원해 심리전을 전개했으며, 시민의 작업장에 침투해서 그들의 밥줄을 끊으려고 공작했다. 이들 정권 또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했으며, 시민의 진보를 가로막은 반동 정권이었다.

반노반문 길 걸은 ‘진보’지식인

촛불혁명 이후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에게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복구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시민들은 그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문재인 정부를 뜨겁게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 현상 앞에서 ‘진보’ 지식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성찰해야 하는 물음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학계 및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그토록 많은 ‘진보’ 지식인들이 왜 반노무현과 반문재인의 길을 선택했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야비한 공작이 있기 전부터, 노무현과 문재인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류 ‘진보’ 지식인들에게 비판받고 비난받았다. 그것은 애정 어린 비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무현과 문재인이 새로운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더 이상 시민의 희망이 될 수 없다는 차가운 평가였다.

마르크스의 반자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반미투쟁과 노동자 혁명을 지지하는 좌파 지식인들은 세계화, 친미, 자유주의, 우경화 등을 이유로 노무현을 가혹하게 비판했다. 노무현과 문재인을 영남패권주의자로 몰아세우고 처음엔 정동영, 천정배, 나중엔 안철수 등을 후원했던 ‘진보’ 지식인들도 있었다. 정파, 이념, 지역, 계급, 학벌 따위의 배경이 무엇이든, ‘진보’ 지식인들의 대다수는 2003년부터 2009년까지는 노무현을, 그 다음에는 유시민과 ‘친노’ 및 ‘노빠’를, 2011년부터는 문재인과 ‘친문’과 ‘문빠’를 거의 비난에 가깝게 비판했다. 그들은 노무현과 노무현주의자들을 이명박과 박근혜 무리와 같은 족속으로 묘사하곤 했다. 그들은 노무현이 부동산 가격을 너무 많이 올려 부동산 가격을 부양하는 이명박 정권을 출현하게 했으며, 노무현이 우경화해서 더 오른쪽에 있는 이명박 정권이 출현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진보’ 지식인들은 노무현이 실패했다고 단정했으며 끝내 작별을 고했다. 그들에게 노무현은 진보의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진보인지 물어야 하며, 진보가 누구의 진보인지 물어야 한다. 진보의 길은 21세기에도 수천 년 동안 민중들이 애써 걸어왔던 자유 시민의 길이어야 한다. 물론 진보에는 여러 길이 있다. 강경 투쟁의 선봉에 서는 것이 가장 찬란한 진보의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반미나 마르크스의 이론이 진보의 유일한 지표가 돼서도 안 된다. 시장경제와 세계화와 자유무역이 진보의 가능한 방식이 아닐 이유가 없다.

진짜 진보란 법률, 제도, 기관, 문화에 진보의 내용을 실제로 담는 일이다. 시민이 시위를 통해 개혁과 혁신을 요구할 수 있지만, 그 요구가 관철되기 위해서는, 투표를 통한 정권 교체, 인물 교체, 법률 개정을 거쳐야 한다. 또렷한 좌파 이념을 갖고 마이크로 또는 토론장에서 진보 정책을 과감하고 선명하게 주장하는 것은 더 많은 진보 운동이고, 국회의원의 의석 분포에 변화를 가져오게 해서 한 뼘의 진보라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은 더 적은 진보 운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노무현과 노무현주의자, 문재인과 문재인주의자들이 더 적게 진보를 이뤘다고 비판하거나, 우리 사회를 후퇴시켰다고 비난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2003년과 2007년 사이 대부분 ‘진보’ 지식인들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무릎 꿇게 하는 데 집중했다. 이들이 우파 지식인들과 함께 노무현과 ‘노빠’ 시민들을 좁은 골짜기로 몰아넣어 협공함으로써 무엇을 얻었을까? 그들은 이명박이라는 괴물을 막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후보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은 고작 3%였다. 2008년 총선에서 이 정당의 국회 의석수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2013년부터 2016년 촛불혁명까지 참으로 많은 시민들이 이 나라의 진보를 위해 애썼다. 거기에 노무현주의자들도 조금 기여했다. 문재인은 2012년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반대와 공격에도 불구하고 2015년 정당의 대표가 되려 했고 마침내 정당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그 정당을 혁신시켰다. 그에게 힘을 보태려고 노무현주의 시민들은 더불어민주당에 입당 운동을 했다. 그 시민들은 정권 교체라는 또렷한 목표를 갖고 있었으며, 동료 시민들을 설득할 만한 좋은 인물을 내세웠다. 그들은 10% 득표나 5% 득표 같은 것을 목표로 하는 정체성 투표가 아니라, 실제로 진보를 이룩할 사람을 최다 득표하게 하는 정권 교체 투표를 했다. 노무현주의자들의 이 참여가 진보의 길이 아니었을까?

대한민국의 ‘진보’ 지식인들은 혁명을 말하면서도 시민들의 진보와 더 많은 민주주의를 말하는 데 소홀했다. 진정한 정치 리더는 투쟁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시민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확대하는 사람이다. 동료 시민들이 진보의 길을 걷을 때까지 기다리고, 함께 전진하고, 함께 쉬는 사람이며, 동료 시민들이 진보하는 만큼 진보의 발을 내딛는 사람이다. 노무현주의란 바로 이것이 진보의 올바른 길이라고 믿는 사상이며, 노무현주의자들은 문재인과 함께 이런 진보 사상을 실천했다. 그들은 지금 이곳을 보다 안전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보다 정의롭고 평등하게 사는 터전으로 만들려고 현실 정치의 현장에 참여하는 능동 시민이었다. ‘노빠’나 ‘문빠’라는 조롱은 그들의 진보를, 능동 시민들의 참여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전략 시민이 된 진보 시민

노무현주의자들은 보통 시민들이 나라와 정당의 주인이 되게 하는 운동에 매진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진보’ 지식인들은 이 운동에 능동 참여했던 시민들이 맹목적이고 팬덤으로 가득 차 있다면서 ‘노빠’, ‘유빠’, ‘문빠’ 등과 같은 멸칭을 즐겨 사용했다. 최근에는 이 시민들이 ‘반지성주의 운동’의 모습을 띤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들은 노무현주의자들이 눈먼 자들이 아니라 현실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다. 노무현주의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비판 정신을 갖고 노무현과 문재인을 지지했다. 비판한다는 것은 헐뜯거나 쉽게 지지 철회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비판한다는 것은 이념과 이상의 빛 아래서 자신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현실 상황을 또렷이 인식하고 대안을 갖고 현실을 개선하려 했다. 그들은 권력 지형과 현행 선거 제도를 거의 정확히 이해했고, 대한민국 동료 시민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들을 설득해나갔다.

그들은 현대 전략이론 또는 게임이론에 비추어 볼 때 가장 현명한 선택을 했다. 그들은 사회 딜레마에 빠지지 않도록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동료 시민들과 더 많이 의사소통했다. 그들은 추악한 이명박근혜 정권의 방해 공작에 굴복하지 않았고 더 많은 댓글, 더 많은 트윗, 더 많은 타임라인으로, 더 많은 커뮤니티에서 의사소통했다. ‘진보’ 지식인들이 주로 책상머리 진보 이념 또는 제도 정치 바깥 투쟁의 관점에서 노무현주의 시민들을 비난하는 동안, 이 시민들은 헌법과 현행 법률 및 제도의 한계 내에서 최선의 전략을 궁리했다. 노무현주의자들은 전략 시민이었다. 그들은 정당을 혁신하고, 동료 시민들에게 자랑스럽게 설득할 만한 정치인을 공직 후보자로 선출했다.

‘진보’ 지식인들은 이 전략 시민들이 ‘차선’ 또는 ‘차악’을 선택한다는 식으로 비판했다. 차선 또는 차악을 선택하는 정치 게임을 조롱하면서 정치 혐오를 부추겼다. 하지만 행위의 논리 또는 결심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전략 시민들은 최선을 선택했다. 자신의 바람, 의도, 목적만이 자기 행위의 유일한 동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좋은 것을 바라거나 나쁜 것을 바라지 않는 것만이 행위의 유일한 동기가 아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확률 예측도 행위의 또 다른 동기이다. 우리는 우리 바람과 믿음을 둘 다 따져보고 행위를 선택한다. 철학자 데이빗슨에 따르면, 한 사건이 의도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행위의 이유들이 그 행위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행위의 이유들이란 행위자의 믿음과 바람을 가리킨다. 우리가 자주 쓰는 ‘확률’이란 말은 ‘확신하는 정도’ 곧 ‘믿음의 크기’를 뜻한다. 주식 투자하는 사람이 주식이 오를 확률을 무시하고 투자하는 짓이 어리석듯이, 유권자들이 후보자의 당선 확률을 무시하고 투표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시민의 행위를 결정하는 동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그 행위로 벌어지는 결과들 중에서 무엇을 더 바라고 무엇을 덜 바라는가 하는 그의 바람, 둘째, 그 행위로 벌어지는 결과들 가운데 무엇이 더 일어날 것 같고 무엇이 덜 일어날 것 같은가 하는 그의 믿음이다. 노무현주의자들은 맹목적으로 노무현이나 문재인을 지지하고 그들에게 투표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모두 동원하여 심사숙고했다. 그들은 정의감과 도덕감에 바탕을 두고 자신들이 바라는 것에 따라, 또한 과학과 정보들에 바탕을 두고 자신들이 믿는 것에 따라, 가장 좋은 행위, 사회과학 용어로 기대효용이 가장 높은 행위를 선택했다. 전략 시민들은 차선이나 차악이 아니라 최선의 행위를 결행한다.

이념에만 투철한 것이 진보의 척도는 아니다. 물론 이념은 정말 중요한 가치이고 그것이 우리 진보의 동력이다. 이념의 빛 아래서 성찰하면서도 이와 함께 현실 세계의 제도, 정치 지형, 여론 동향 등의 정보를 바탕으로 무슨 일이 앞으로 벌어질지에 대한 개연성 판단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현실 세계는 불확실과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자유 시민은 자유롭고 평화롭게 정의롭고 평등하게 지금 이곳에 거주하기 위해, 역사의 지평에 있는 이념뿐만 아니라 지금 이곳의 생생한 정보들에 바탕을 두고 자기 행위를 선택한다. 그것이 최선의 길이고 지속가능한 진보의 길이다. 20세기 구식 ‘진보’ 지식인들은 노무현과 문재인의 길, ‘노빠’와 ‘문빠’의 길이 또 다른 진보의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내다보지 못했다. 그들은 ‘친’과 ‘빠’ 같은 표현을 쓰면서 그 시민들을 정서와 감정에 휩쓸려 다니는 반지성 군중으로 그렸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사실은 반노와 반문 정서에 갇혀 능동 시민의 각성과 성장을 못 보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 있는 이명박 식 탐욕과 박근혜 식 몽매가 드러나는 동안 ‘입진보’의 무책임한 냉소와 탁상 지성의 태만도 함께 드러났다. 시민 모두가 진보 시민, 전략 시민, 지식 시민이 되게 하는 데 헌신하는 새 세대 진보 지식인들이 나타나야 한다.

 
 


김명석 /국민대 교양대학·철학
물리학을 공부한 다음 언어철학 및 심리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북대 기초과학연구소, 중앙인사위원회 등에서 일했으며, 현재 국민대 교양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후기 분석철학의 인식론과 언어철학, 언어와 사고의 기원, 자유의지와 마음의 힘, 뜻 믿음 바람 행위의 종합 이론, 양자역학의 존재론 해석을 주로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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