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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인문학의 꽃
미술사, 인문학의 꽃
  • 신채기 계명대 회화과
  • 승인 2017.10.16 1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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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브래드 피트: 사실은 나 MIT에 다닌 적 없어. 노틀담大...미술사 전공
안젤리나 졸리: (어이없다는 듯이) 미~술?
브래드 피트: 미·술·사! (정색을 하며) 평판 높은 거라구! (It’s reputable!)
-영화 <Mr. & Mrs. 스미스> 중에서-

학부 시절,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미술사'라고 대답을 하면 그것이 ‘간호사’나 ‘약사’ 같은 자격증이냐고 반문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미술사라는 학문 분야에 상대적으로 낯설어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미술사는 어디 딴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겠지만, 미술사 분야에 몇 세기에 걸친 학술적 체계를 세워온 서양에서도 미술사라는 과목은 적어도 실용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 모양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이 뭔가 (어울리지 않게) 우아하거나 고상하거나 순수한 구석이 있음을 보여야 할 때 ‘미술사 전공’을 들먹인다. 위에 인용한 영화 <Mr. & Mrs. 스미스>」(감독 더그라이만, 2005)의 브래드 피트처럼 말이다.

때로 미술관을 소유한 돈 많은 부자들이 그들의 컬렉션을 위해 미술사를 공부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나와 가까이 지낸 친구들 중에 그런 부자는 없었다. 차라리 우리는 모두 미술사를 공부하면 배고플 줄 알면서도 이 분야를 너무 좋아해서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학사 전공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영문과나 불문과 같은 타 전공 출신이 애써 길을 만들어가며 공부한 케이스였다. 당연히 직장을 찾는데도 애를 먹었다. 정식으로 미술사학과가 있는 대학이 국내에 몇 군데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의 대부분은 인문대 미술사학과 대신, 실기 중심의 미술대학에 이론 교수로 채용되었다. 보다 융합적인 전공을 원하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문화경영학과나 문화콘텐츠학과와 같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도 했다. 공부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미술 작품이 역사, 철학, 심리, 문학, 종교, 나아가 언어학과 여성학까지 불러들이니 공부가 끝나는 자리가 없었다. 영어를 연구를 위한 기본 언어로 사용하는 상태에서 나는 석사와 박사 과정에서 제 2외국어 시험으로 이태리어도 쳤고, 불어도 쳐야했다. 그래도 그 길에서 만난 친구들이 있어서 좋았다. 모두 미적으로 예민하고, 글을 잘 쓰는 친구들이었다. 시각적인 데이터를 분석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인생의 아름다움에 마음 깊이 감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증권회사 등에서 ‘잘 나가다가’ 이 쪽으로 인생을 선택한 친구들을 보면 그 ‘잘 나가는’ 이상의 탁월한 재능이 예술적인 감수성에 있었다. 그런 친구들이 미술사를 택하지 않았으면 아마 겪지 않았을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숙연함을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끼리 모이면 처음 본 사이라도 뭔가 주파수가 맞았다. 커뮤니티는 작았지만 긍지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았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미술사가 뭐가 좋다고, 다들 병이다, 병” 그렇게 호기롭게 외치면서 우리는 마음이 조용히 기뻤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문화적 환경이 열악했던 것 같다. 서울시립미술관이면 서울을 대표하는 기관인데 그 곳의 큐레이터 자리가 서울시 공무원들이 돌아가면서 발령 받는 직책이라는 사실에 너무 놀랐었다. 하지만 미술사 인구가 늘고, 학예사 자격증 제도가 자리를 잡으면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자들이 채용되기 시작했고, 때맞춰 위로는 국립박물관 및 국립미술관 관장으로 미술사학자들이 임명되었다. 아래 위에서 나사가 동시에 조이면서 기관이 급속도로 전문화 되어갔다. 한국은 아직도 학예사나 미술 분야의 전문인들이 받는 대우가 개선될 여지가 많지만, 그래도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큰 발전을 했던 것으로 평가한다.

이제 많은 국내 대학들에서 미술사는 인기가 높은 기본 교양과목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문화적 소양을 높이고 글로벌 시민정신을 고양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문화외교, 문화사업, 문화콘텐츠, 문화관광, 문화경영, 문화교육 등 파생되는 분야도 늘어가고 있다. 문화 향유 계층의 저변 확대를 꾀하는 시대적 요구에 발맞추어 배출되고 있는 미술사 전공자들은 곳곳에서 새로운 시대의 문화 지형도를 구축해 나갈 인재들이 될 것이다.

결론인 즉, 미술사 분야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절대적 가치와 최선의 아름다움, 나아가 그만큼의 (어쩌면 절대적 가치를 추구한 대가로 겪는) 인간적인 실패와 절망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겸손함에 대한 지혜의 보고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서 백남준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한 임팩트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인류 최고의 정신문화적 유산들. 그것은 과거 인간이 걸어온 최선의 노력에 대한 자취이자 현재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실용적인 학문의 대표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글쎄, 우리 중 누군가는 이런 것들을 공부해도 좋지 않겠는가?

 

신채기 계명대·회화과

미국 마운트홀리옥대 학사, 매사추세츠 주립대 석사, 이화여대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스미스칼리지 강의전담교원,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부 선임전문위원(Senior Cultural Specialist)으로 근무했다. 2009년 ‘미국 국무부 메리토리어스 아너 어워드(US Department of State Meritorious Honor Award)’를 수상했다. 저서 로는 『현대미술, 현실을 말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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