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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버리고 서양문명 수용 주장…21세기와 조응하는 100년 전 지식인의 고뇌
‘유학’ 버리고 서양문명 수용 주장…21세기와 조응하는 100년 전 지식인의 고뇌
  • 교수신문
  • 승인 2017.10.1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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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_ 제26강.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의 ‘일본과 동양의 근대화’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의 2017년 강연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이 강연 3섹션 ‘정치/경제’ 영역으로 이동했다. ‘정치/경제’ 강연들에서는 시대의 사상, 인식 체계의 틀을 깨고 정치·경제의 발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변해 왔는지 살펴본다.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은 34강에 걸쳐 새로운 시대로 도약을 가능케 한 역사적 인물 혹은 작품을 선정해 혁신적 사유를 조명해보는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의 네 번째 강연 시리즈다. 제26강 「일본과 동양의 근대화」(미야지마 히로시·성균관대) 발표문 일부를 요약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오늘의 강연에서 필자에게 주어진 주제는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일본에서 대단히 유명한 사람에 대해서다. 후쿠자와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이며, 게이오의숙대학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후쿠자와에 대해서 모르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일본에 여행 간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일본의 만엔 권 지폐에 후쿠자와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을 때 후쿠자와는 만 35세였다. 그는 1901년에 사망했으니까 전반은 도쿠가와 시대를 살았고 후반은 메이지 시대를 살았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생을 ‘一身二生’, 즉 한 몸으로 두 가지 인생을 살았다고 했지만, 그 인생의 바로 중간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문명론의 개략』(이하 『개략』)은 1875년에 간행된 책으로, 후쿠자와의 대표적인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 책의 준비를 위해 1년 이상 다른 활동을 중단해서 집필에 전념했다고 후쿠자와가 말했듯이 상당히 체계적인 내용을 가진 것으로, 일본에서는 지금도 이 책에 관한 연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도쿠가와, 메이지의 두 시대를 산 인물

이 책에서 후쿠자와가 주장하려고 했던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서양의 문명을 수용함으로써 일본의 독립을 지켜야 된다, 바꿔 말하면 서양 문명을 수용하지 못하면 서양의 식민지가 될 것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양 문명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후쿠자와가 경계했던 것은 서양 문명의 힘을 눈앞에 보고 일본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존재였다. 특히 洋學者라고 불리던 사람들 중에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서양 문명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문자를 버리고 로마자를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비관론에 대해 후쿠자와는 일본이 서양 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주체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당시 일본에는 서양 문명을 잘 아는 사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 대해서도 잘 안다는 점이었다.

후쿠자와가 서양 문명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로 인식했던 것은 유학의 존재였다. 유학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서양 문명의 수용도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개략』의 상당한 부분이 유학 비판에 할애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후쿠자와가 중시한 것은 德과 智의 관계였다. 즉 유학에서는 지보다 덕을 중시하는 데 대해 후쿠자와는 지를 덕보다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것과 함께 후쿠자와가 유학을 비판한 또 하나의 이유는 도덕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였다. 유학에서는 도덕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후쿠자와는 정치와 도덕은 별개의 것이며 정치는 도덕에서 분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학을 강하게 비판한 후쿠자와였지만, 후쿠자와와 유학의 관계는 조금 복잡한 측면이 있다. 그는 계몽 지식인으로서 많은 번역서를 썼지만, 그때 고심했던 문제 중의 하나가 서양의 용어를 어떻게 번역하는가의 문제였다. 후쿠자와는 새로운 번역어를 많이 만들었고 그중에는 지금도 일본이나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말도 많은데, 이러한 번역어를 만들 때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이 유학에서 유래하는 말과 개념이었다.

지금은 人權으로 번역되는 ‘human right’라는 영어를 후쿠자와는 ‘人間의 通義’로 번역했다. 여기서 사용된 ‘義’ 자는 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지만, 후쿠자와는 유학적인 개념으로서 사용했다. 이처럼 후쿠자와의 문장에는 유학적인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쉽게 찾아낼 수 있는데, 후쿠자와의 문장이 명문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도 그의 한문 지식에 있다고 여겨진다.

문벌제도, 그리고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유학이라는 인식이 후쿠자와의 유학 비판의 원점이었다고 지적했지만, 이러한 인식도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성리학은 태생적인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제도가 科擧다. 즉 과거제도는 신분이나 출신을 불문하고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으면 누구나 관료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제도다. 그래서 문벌제도를 지탱하는 사상으로서의 유학이라는 후쿠자와의 인식은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 대해서는 맞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중국이나 한국에 대해서는 맞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상과 같이 후쿠자와의 유학 인식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잘못의 원인으로서, 성리학에 대학 인식의 결여와 함께 일본 유학과 중국, 한국 유학의 차이에 대한 몰이해를 지적할 수 있다.

후쿠자와의 유학 인식의 문제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유학과 근대화의 관계에 대해서다. 후쿠자와는 서양 문명의 수용을 통한 근대화를 방해하는 존재로서 유학을 비판했지만, 최근에 와서 일본에서는 19세기 초기 이후 유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그것이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했다는, 후쿠자와의 생각과 완전히 정반대의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스승의 나라로 인식한 중국

후쿠자와는 중국이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앞으로 중국의 변화에 대해 일본은 최대한 협력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중국을 師國, 즉 스승의 나라라고 하면서 수천 년 이래의 師恩에 보답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희망은 그 이후의 일본과 중국의 관계를 볼 때 이뤄지지 않았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후쿠자와의 이러한 중국 평가가 어디까지나 중국이 일본과 같은 방향으로 가려고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중국의 근대화가 일본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간다는 생각은 후쿠자와에게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후쿠자와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개화파 인사과의 교류를 통해서 생긴 것이었다. 그리고 개화파 사람들을 보면서 거기에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도 많은 연구자가 지적해온 그대로다. 후쿠자와의 한국 인식의 장점과 단점은 이러한 개화파와의 관계에서 유래한 부분이 크다고 생각된다. 즉 개화파에 대해 공감한 나머지 자신과는 다른 타자라는 인식이 부족했었다는 이야기다.

이상, 후쿠자와라는 100년 이상 이전에 살았던 일본인에 대해 알아봤다. 그 이유는 후쿠자와가 고민했던 문제가 실은 지금도 충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필자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후쿠자와가 살았던 시대를 잇는 큰 변동기다. 그리고 그 변동의 중심에 중국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현재의 중국을 어떻게 봐야 되는가,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를 생각할 때 후쿠자와가 직면했던 문제와 통하는 부분이 많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특히 유학의 문제는 지나간 이야기가 아닌, 앞으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까, 그런 예감도 강하게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후쿠자와를 통해 동아시아의 근대를 다시 검토하는 일이 한국 사람에게도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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