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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과 변화 앞에서 학자들이 해야 할 일
불연속과 변화 앞에서 학자들이 해야 할 일
  • 교수신문
  • 승인 2017.10.1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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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인간의 살림살이』 칼 폴라니 지음, 이병천·나익주 옮김, 후마니타스, 638쪽, 30,000원

모든 발전에서 필연적으로 소규모 표본(specimen)이 대규모 표본에 선행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단지 편견에 불과하다. 역사에서 그런 순서를 가정하는 것은 생물 진화 법칙의 무비판적인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최장거리 교역이 단거리 교역에 선행했다. 이것은 마치 보통 가장 먼 곳에 가장 먼저 식민지를 설치한 것과 같다. 그리고 거대한 제국이 소규모 왕국보다 역사적으로 일찍 출현했다. 비슷한 오류는 신용이나 금융과 같은 현상을 ‘더 나중의 발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오류는 부분적으로 최근 몇 세기의 단기적 시각에서 신용과 금융 현상이 우연히도 현대 시장 제도의 출현 이후에 현저해졌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 특별한 오류는 더 대중적인 ‘단계’론의 한 형태로 집약됐다. 이 이론은 ‘자연경제·화폐경제·신용경제’의 순서를 발전 법칙으로 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채권·채무 관계는 시장의 존재에 선행하는 원시적 현상이며, 고대의 저장 경제는 교환 수단으로서의 화폐 사용이 중요성을 띠기 훨씬 이전에 대규모 금융 계획과 회계를 실시했다.

19세기 역사 기술의 고민거리였던 연속성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사실의 순서뿐만 아니라 사실 자체를 오해했다. 유기적 과정에 함축돼 있다고 간주되는 연속성은 단지 사건의 한 가지 양식에 불과하며, 이양식과 함께 처음부터 발전의 불연속성은 존재한다(전체 과정이란 이 둘의 결합이다). 작은 시작으로부터 연속적으로 발전하는 것 이외에도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양식이 있다. 이것은 이전에는 관련이 없었던 요소들로부터 불연속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새로운 복합적인 전체의 출현과 같은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분야’는 특정 조건 아래의 사회집단이다. 이런 불연속성은 어떤 생각과 어떤 개념이 잡단 성원에게 어느 정도 통용되는지를 폭넓게 결정한다. 그러나 일단 그 씨앗이 뿌려지면 이런 생각이나 개념은 엄청난 속도로 변화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이제 개인적 행동의 유형은 이런 생각이나 개념이 미리 형성한 새로운 일반적 유형에 쉽게 동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관련성이 없었던 행동 요소들이 새로운 복합적인 전체 속에서 어떤 중간 과정도 없이 직접 연결된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이른바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접근과 유물론적 접근은 정반대라기보다 오히려 전체 과정 속의 상이한 두 국면의 산물처럼 보인다. 관념론자는 인간의 사고와 관념이, 비록 신비적인 형태라 할지라도, 제도의 출현이나 역사의 전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유물론자들은 물질적 요인이 그런 사고와 관념 확산의 조건이 되며, 따라서 사고와 관념이 헤겔식의 관념론자가 상정한 것과 같은 추상적 변증법의 산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인류의 역사 그리고 경제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진화론자가 주장하곤 했던 무의식적 성장이나 유기적 연속성을 따르지 않는다. 그런 접근은 필연적으로 오늘날의 이행 단계에서 인간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경제 발전의 일부 국면을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기적 연속성 신조는 결국 자신의 역사를 형성할 수 있는 인간의 힘을 약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제도에서 의도적 변화가 맡는 역할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마음과 정신의 힘에 대한 신뢰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성장하는 지혜에 대한 신비로운 맹신으로 인해 인간이 자신의 변화하는 제도 속에서 정의·법·자유의 이념을 다시금 구현할 자신의 힘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학자는 이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첫째, 학자는 우리의 개념에 명료성과 정확성을 부여해야 한다. 학자들의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우리는 인간이 활동하는 상황의 실제적 특징에 가장 잘 어울리는 용어로 인간의 살림살이 문제를 정식화할 수 있다. 둘째, 학자는 인간 사회에서 계속 변화하는 경제의 위치와, 과거의 문명이 거대한 전환에 성공적으로 대처했던 방식을 연구해, 원리와 정책의 범위를 우리의 의지대로 확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학자의 이론적 과제는 광범위한 제도적·역사적 토대를 바탕으로 인간의 살림살이에 대한 연구를 정립하는 것이다. 연구에 사용할 방법은 사고와 경험의 상호 의존에서 얻는다. 자료의 참조 없이 구성된 용어와 정의는 무의미하며, 우리 시각으로 재조정하지 않는 사실을 단순히 수집하는 것도 쓸모없다. 이 악순환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개념적 탐구와 경험적 탐구가 함께 발맞추어 진행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지속적인 노력을 위해 이 탐구의 여정에는 어떤 지름길도 없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 저자 칼 폴라니는 영국 자본주의의 실상을 보면서 시장경제의 출현이 가져다준 인류사적 충격에 대해 섬세하게 연구한 경제문명사가다. 냉전시기인 1960년대에 버트런드 러셀, 아인슈타인, 사하로프 등과 <공존>이라는 잡지 창간을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거대한 전환』(1944), 『초기제국에서의 교역과 시장』(공저, 1957),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1966) 등이 있으며, 이 책 『인간의 살림살이』(1977)는 유고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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