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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건방
오만과 건방
  • 이충진 한성대·철학
  • 승인 2017.10.1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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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하다.” 네이버 사전에서 ‘오만하다’를 찾으면 나오는 설명이다. “잘난 체하거나 남을 낮추어 보듯이 행동하는 데가 있다.” 역시 네이버 사전에서 ‘건방지다’를 찾으면 나오는 설명이다.

지난 주 뉴스는 하루 종일 ‘오만’이라는 단어를 내보냈다. 사정은 이렇다. 김상조(공정위 위원장)가 이해진(네이버 창업자, 대주주)을 잡스만 못한 사람이라 말하자, 그것을 본 이재웅(다음 창업자)이 김상조를 향해 ‘오만하다’라고 말했다.

‘오만하다’와 ‘건방지다’라는 말은 그냥 말인 것이 아니라 ‘나쁘다’라는 가치평가를 표현하는 말이다. 더욱이 이 말은 평가하는 사람과 평가 받는 사람 사이의 수직적 위계관계를 전제한다. ‘건방지다’라는 말은 형이 아우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사용하는 말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건방지다’는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만’ 향할 수 있는 말이다. ‘오만하다’도 대부분 그렇다.

‘김상조는 오만하며 건방지다’라는 말은 ‘김상조와 이해진(또 이재웅) 사이에 위계관계가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함축한다. 또 그 말은 ‘위계관계 안에서 김상조는 아래에, 이해진(또 이재웅)은 위에 존재한다’라는 가치평가를 나타낸다. 이러한 주장과 평가는 “3류가 1류를 깔본 셈이다”라는 안철수의 발언에서 가장 정확한 표현을 얻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오만하고 건방지다’는 몹시 위험해 보인다. 기업의 수장이 공직자를 향해 ‘오만하고 건방지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 활동이 공동체를 돌보는 정치 활동에 우선한다’라는 생각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 생각은 필경 ‘공권력을 사용해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라는 생각으로 귀착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나 트럼프 정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오만하고 건방지다’는 역사적 무지함의 소치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의 한국은 ‘87년 체제’의 결과물이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는 크게 다를 바 없다. 1980년대는 ‘광주’와 함께 시작된 시기였으며, 그때 그곳’을 분노와 눈물로 돌파하지 않았던 사람은 인권과 민주주의에 무감각하고 국가와 민족에 무책임한 사람이다. 그들과 ‘저들’ 사이에 위계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87년 체제’를 몸으로 만들어낸 사람들과 그 체제의 덕을 보며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 있는 위계관계일 것이다. 이 위계관계를 부인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우리의 근대사 앞에서 ‘오만하고 건방진’ 사람이다.
 

1980년대 이전까지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은 한국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협력했다. 그 둘 사이의 위계관계는 분명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동일한 목표를 공유했었다.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지금의 ‘젊은’ 재벌들은 정치권력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나름의 노하우를 가진 듯하다. 하지만 1990년대 벤처로 부를 축적한 새로운 기업가들은 기업가 정신에는 투철했지만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성찰은 없었다. 국가의 지원은 당연한 일이었고 비즈니스의 결과는 모두 자신만의 몫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갖고 있었던 이러한 마인드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의 주인이 되었어도 변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시장의 ‘레전드’를 향한 공직자의 평가는 당연히 일종의 모욕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오만하고 건방지다’는 이러한 감정적 반응의 표현인 셈이다.

이재웅은 ‘오만’이라는 자신의 말이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라며 철회했다. 그의 진심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든 이번 일이 막장 드라마가 되지 않은 것은 그의 현명함 덕분이다. 하지만 김상조의 반응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재웅의 생각에 동의를 표하고 이해진에 사과를 표한 그의 행동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맨 몸에서 시작해서 의미 있는 기업을 키워낸 기업가”(이재웅)에게 정부를 대변하는 사람이 ‘그 이상’의 역할을 주문하는 것, 즉 한 기업의 대표자로 머물지 말고 한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요구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 성공한 기업가를 존중하는 적절한 방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 공정위 위원장에게 필요한 것은 “공직자로서의 자중”(김상조)이 아니라 기업인들의 ‘오만과 건방짐’을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우리라고 ‘한국의 잡스’를 갖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몇몇 어리석은 기업가처럼 정치권력에 기웃거리는 ‘오만하고 건방진’ 짓만 하지 않는다면, 이해진에게도 이재웅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젊은 시절과 무관하게 말이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제대로 된 ‘오만과 건방짐’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온 국민의 희망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충진 한성대·철학
독일 마르부르크대에서 칸트 법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칸트의 正義論」, 「헤겔의 絶對知」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이성과 권리』, 『독일 철학자들과의 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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