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8-12-12 14:09 (수)
붓보다 펜을 들어야 했던 두 지성 …아카이브 작업도 돋보여
붓보다 펜을 들어야 했던 두 지성 …아카이브 작업도 돋보여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9.30 03: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제_ 열화당의 <책과 선택> 32호 그리고 김용준과 존 버거

근원수필. 익숙한 이름이다. 조금 다층적이다. 근원 김용준(1904~1967). 대구 출신의 화가이자 수필가가 쓴 수필집 『근원수필』(을유문화사, 1948)을 가리키는 동시에, 이 화가가 개척한 빼어난 글쓰기 일반을 통칭한다. 1967년 작고했으니 올해가 그의 오십 주기가 된다. 한 출판사가 이를 잊지 않고 기억해, 그를 호명했다. 열화당(대표 이기웅)이다.

열화당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타블로이드판 한 장짜리로 <미술신간뉴우스>를 부정기적으로 발행했다. 책 정보가 드물었던 시기에 책소식지를 자처한 셈이다. 5호까지 발행하다가 이후 1983년 6호부터 북디자이너 정병규와 협력해, 제호를 <책과 선택>으로 바꾸고 지면도 늘려 1994년 16호까지 발간했다. 역시 부정기적이고 여전히 무가지였다. 그 <책과 선택>이 최근 32호로 ‘근원 김용준 오십 주기 기념 특집호’로 나왔다. 타블로이드판 15쪽에 불과하지만 알곡이 넘쳐 난다. 

먼저 질문 하나. 열화당은 어째서 <책과 선택>을 내놓은 걸까. 이것을 이해해야 이들이 근원 김용준 오십 주기 기념 특집호를 발간한 문화사적 맥락을 더듬어낼 수 있다. 그들은 17호를 다시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상업적 책 선전 아닌 유익한 인문적 소통 지향

“돌아보면, 처음 <책과 선택>을 발행하면서부터 수많은 ‘책’ 중에 무엇을 ‘선택’하여 읽어야 하는지에 관해 고심하며 독자들에게 이 무가지를 선보여 왔으니, 제호에 담긴 의미는 지금도 유효하다 할 것이다. 다만, 정보의 바다 속에 또 하나의 무가지를 만들어 배포하는 것이 자칫하면 얼마나 무모한 일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했고, 숙고 끝에 십사 년 만에 <책과 선택> 17호를 다시 발간한다. 새로이 선보이는 <책과 선택>은, 건강한 독서문화를 만들어 가려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지만, 이 매체가 책을 선전하는 상업적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고, 무엇보다 새로운 읽을거리와 참신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무게를 두려 한다. 그리하여 책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책으로는 담아내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 유익한 문헌과 자료의 소개, 전시소식과 책방 정보 등을 이 매체에 담아낼 것이다. (……)  우리는 이 작은 매체가 ‘가까운 이들과 나누는 정다운 이야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다만, 정답기만 할 게 아니라 새롭고 유익하고 인문적이어야 할 것, 그것이 바로 <책과 선택>의 존재 이유다.”

‘건강한 독서문화’, ‘상업적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고’, ‘새로운 읽을거리’, ‘유익한 문헌과 자료의 소개’, ‘유익하고 인문적이어야 할 것’ 같은 어구가 눈에 쏙 들어온다. 그렇다. <책과 선택>은 책을 말하면서도 결코 상업적 선전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유익하고 건강한 인문적 활로를 지향하겠다는 자기 의지를 천명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책과 선택>이 32호에 이르렀다. 얄팍한 수식도 분식도 없는 이 담백한 <책과 선택>이 32호 특집에 ‘근원 김용준’을 내세웠는데, 이것은 한국출판문화사 나아가 지성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열화당은 <책과 선택> 32호의 근원 김용준 특집과 함께 또 하나 흥미로운 기획을 성북동 문화공간 17717에 마련했다. 「매화와 붓꽃: 근원 김용준과 존 버거의 글 그림」(2017.9.14.~10.15)이다. 아니 어째서 근원과 존 버거일까. 열화당 측은 이 전시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동양화가, 미술비평가, 한국미술사학자인 근원 김용준과 미술비평가, 소설가, 사회비평가인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 이 둘은 한반도와 유럽이라는 다른 시공간에 머물렀지만 적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 회화를 전공했으나 그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으로 붓보다는 펜을 들었고, 그렇게 남겨진 방대한 원고는 감성과 지성 모두를 아우른다. 에세이와 드로잉에는 사소한 것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이, 미술비평문에는 독특하고 날카로운 논리가 담겨 있으니, 이처럼 강건함과 부드러움, 문장과 이론을 동시에 갖춘 근현대 인물을 세계 미술사에서 만나기 쉽지 않다. 열화당은 2002년 ‘근원 김용준 전집’을 다섯 권으로 완간하고 그의 사십 주기인 2007년 補遺版을 내면서 그의 모든 저작과 작품을 한 자리에 정리했다. 존 버거의 책은 2004년부터 내기 시작해 지금까지 열일곱 권을 출간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 갈 예정이다. 이처럼 인문주의적 예술출판의 이상적인 상을 보여 주는 두 저자의 만남을, 김용준의 오십 주기와 존 버거의 죽음을 맞은 해에 「매화와 붓꽃」이라는 전시로 마련했다. 거창한 기념보다는 그들이 남긴 글귀와 그림을 만나는 소박한 기회로 삼았다. 전시 장소의 의미를 살려 근원의 성북동에서의 인연도 함께 이야기한다.”

근원과 존 버거가 인문주의적 예출출판의 이상적인 상을 보여준다는 것, 그래서 이들을 한 자리에 마주 서게 한다는 기획 의도는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워낙 방대한 세계를 가진 두 사람이지만, 이번 전시에는 그들의 진솔한 생각이 담긴 『근원수필』과 『벤투의 스케치북』을 중심으로, 존 버거의 드로잉, 근원의 수묵화, 저서와 장정, 관련 사진 및 자료 들로 구성했다. 

바로 이 전시에 맞춰 발행한 <책과 선택> 32호에서는 근원이 살았던 성북동 老柿山房과 의정부 半野草堂 이야기, 벗들의 해학 넘치는 골동 취미를 엿보고, 근원을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의 글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근원전집 보유판 이후 현재까지 새로 발굴된 자료를 보완한 ‘근원 김용준의 전작 목록’을 실어 앞으로도 계속 완성해 나갈 김용준 아카이브를 위한 준비로 삼은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근원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표지를 꾸민, 오십 주기 기념 백 부 한정판 근원 전집 리커버도 전시 판매한다. 

성북동17717 전시장에서 만나는 두 예술가

전시 기간 중에 두 차례의 강연과 대담이 열린다. 미술평론가 최열이 말하는 「근원 김용준의 삶과 예술」이 성북동17717 전시장에서, 번역가 김현우, 독립큐레이터 최재원, <악스트> 편집장 백다흠이 함께 이야기하는 「존 버거를 위하여」가 홍대 앞 상상마당에서 와우북페스티벌 프로그램의 일부로 열린다. 존 버거의 드로잉들은 올 봄 서울 온그라운드갤러리와 전주 서학동사진관에서의 두 차례 전시를 끝으로 유족에게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근원의 오십 주기와 함께하기 위해, 또한 서울에서의 앵콜전을 원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잠시 더 머물기로 했다. 

시간과 장소의 한계로 근원의 많은 작품을 보여 주지는 못하지만 몇몇 새로운 자료들을 포함한 것도 전시의 미덕이다. 키가 유달리 큰 벗 김환기가 자신을 ‘翁’이라고 부르는 섭섭함을 유머러스하게 풀어 가는 글과 그림, 인도의 간디가 살았던 허름한 집을 사진으로 보고 쓴 단상과 삽화, 1942년 그린 凡夫 金鼎卨의 초상 원화, ‘半窓春色’이라는 화제가 있는 「매화」 원화, 『근원수필』 첫머리에 나오는 그 유명한 글 「매화」가 처음 발표된 신문지면 원본 등, 보유판에 실리지 못했던 자료들도 소개된다. 전시장 한켠에 마련된 서가에는 두 작가의 책뿐만 아니라 열화당에서 출간된 주요 도서들이 함께 전시 판매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전시 이름을 ‘매화와 붓꽃’이라고 했을까. 기획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이들이 매화와 붓꽃을 두고 쓴 짧은 글을 보면, 서로의 존재도 몰랐고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했던 두 작가의 유사한 표현에 놀라게 된다. 근원은 X선생 댁 매화의 暗香을 맡으며 그리스의 대리석상, 중국의 석굴사원, 신라의 석불, 조선의 백자로 환상을 전개하고, 존 버거는 집 앞마당에 핀 붓꽃을 그리며 책장의 펼침, 건축적 구조의 본질, 터키 모스크의 고요함을 연상한다. 근원은 ‘있는 체도 않고 隱士처럼 앉아 있는’ 매화 앞에서 그 향기가 다칠 세라 호흡을 가다듬는다. 존 버거는 꽃을 그리며 그 형태가 ‘어떤 언어로 씌어진 텍스트’라고 상상했다. 그들은 말 없는 것의 메시지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혼란의 현대사를 예술과 글쓰기를 통해 이해하려 한 동서양의 두 지성. 그들의 책을 낸 출판사를 매개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조금 부족하고 생소할지 모르나, 책을 콘텐츠로 한 색다른 시도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중심에 <책과 선택>이라는 무가지 형태의 문화 마당이 오롯하게 서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