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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가로지르는 유령, 그는 어떻게 미래로 나아가고 있을까?
현대를 가로지르는 유령, 그는 어떻게 미래로 나아가고 있을까?
  • 주재형 서울대 강사·철학
  • 승인 2017.09.2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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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스피노자의 귀환』 서동욱·진태원 엮음 | 민음사 | 640쪽 | 30,000원 | 2017.4

한국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논문집인 이 책은 60년대 프랑스에서 일어난 스피노자 르네상스 이후 현대 스피노자학의 성과들을 집약해놓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러한 요약적 제시의 수준을 넘어 보다 야심찬 목표를 겨누고 있다. 그것은 바로 스피노자를 근현대 철학의 무대로 복귀시키는 일이다. ‘스피노자의 귀환’이라는 선언적 울림을 가진 책의 제목은 이러한 의도에서 연유한다. 각 연구자들의 글들 또한 이 의도에 따라 갈등적이거나 협력적인 대화 속에서 스피노자와 근현대 철학자들을 만나게 하고 있다. 논문집 전체를 통일하는 학술적 기획의 이 명확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미덕이다.

그런데 귀환은 전면적이고 명시적이지 않다. 스피노자는 가령 칸트의 경우처럼 근대 철학의 지평을 열어젖히고 현대 유럽 철학의 정체성으로 남아 있는 주류 철학자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철학사에서 “잊힌 적은 없으나 올바로 알려질 기회 역시 정당하게 가져 보지 못”한 철학자다(7쪽). 그러므로 이 책에서 보여주는 스피노자의 ‘귀환’은 여러 면에서 위풍당당한 금의환향이 아니라 주변과 중심의 경계에서 부유하는 유령적 현전에 가깝다. 사실, 이 책을 구성하는 4개의 部는 스피노자라는 유령이 출몰하는 근현대 철학의 여러 장면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주변과 중심의 경계에서 부유하는 유령적 현전

‘현대철학의 여명기에 선 스피노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책의 1부는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가 스피노자와 맺는 관계들을 탐구하고 있다. 니체는 내재적 자연주의이자 선악을 넘어선 윤리학으로서의 철학을 제시한 스피노자를 자신의 선구자로 인정한다. 그럼에도, 니체는 곧바로 극복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스피노자와 갈등적 경쟁 관계를 형성했다(백승영).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의 경우, 스피노자는 인간 사유의 근본적 합리성과 인과성에 대한 믿음을 전례 없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프로이트 자신의 선구자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쟁이 아니라 프로이트 자신의 무관심과 피상적 이해로 인해 스피노자는 정신분석학의 무대에서 사라진다(김은주). 가장 뜻밖의 만남으로 보이는 것은 하이데거와 스피노자다. 하이데거의 기분 개념과 스피노자의 정서 개념은 사유와 감정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사유한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이들은 이내 교차하며 다른 길을 간다. 하이데거의 기분이 근원적이고 초월론적인 사유라면, 스피노자의 사유는 정서의 인과역학에서 초월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김문수). 요컨대 스피노자는 현대철학의 여명을 열 수 있었으나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던 사람, 그래서 닮고도 닮지 않은 가능세계의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처럼 보인다.

‘현대철학의 쇄신에 개입하는 스피노자’란 제목의 2부에서 스피노자는 이제 바깥의 거울처럼 현대 철학을 되비추는 역할을 맡는다. 가령 라깡의 인격 개념, 자아 개념, 주체 개념은 각기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적 인과론, 정서 모방 이론,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의 윤리와 연결되거나 대조돼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라깡과 스피노자 양자의 새로운 이해에 관련해 상당한 이론적 소득을 남기는 이러한 접근은 양자의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라깡적 정신분석의 윤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 윤리의 가능성을 간직하기 때문이다(김은주). 반면 들뢰즈는 그의 사유에서 스피노자가 전면에 서는 예외 사례일 것이다. 들뢰즈의 존재의 일의성 개념이 스피노자 철학의 체계에 대한 독창적인 재전유임을 보여주는 면밀한 분석을 통해서, 스피노자는 들뢰즈 철학의 독보적인 핵심적 원천으로 나타난다(서동욱).

이 2부의 마지막에는 또 다시 뜻밖의 두 만남들이 있다. 우선, 스피노자와 푸코의 비교라는 거의 불가능해보이는 이론적 작업은 ‘관계론의 사유’라는 독창적인 중심점을 통해서 전개된다. 실체의 철학자 스피노자와 긍정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밝혀내지 못한 권력적 예속의 철학자 푸코라는 이중의 통념에 맞서, 스피노자와 푸코의 이론적 연대는 관계론의 강점을 입증한다. 관계론은 구체적인 인과관계의 분석을 통해 현실을 설명해낼 수 있는 이론적 틀이며, 이러한 관점에 따를 때 권력은 저항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지 않으며 오히려 개방한다(진태원).

다음으로, 바디우와 스피노자의 만남은 바디우의 존재론적 공백을 둘러싼 이중의 쟁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우선, 바디우가 제기하는 존재론적 공백의 문제는 기존의 지식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2종 인식과 3종 인식 간의 간극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디우의 공백이 결단주의적 주체의 관념으로 이어진다면, 이러한 공백을 끝끝내 거부하는 스피노자는 합리주의적 주체의 관념을 고수하는 길로 접어든다(박기순). 이처럼 이 연구들은 라깡, 들뢰즈, 푸코, 바디우의 사상들을 때로는 그 핵심에서 때로는 주변에서 때로는 아예 외부에서 비추는 거울로 출몰하는 스피노자의 유령적 현전을 확증하고 있다.

이제 3부 ‘현대 정치 철학의 실험실 스피노자’에서 알튀세르, 네그리,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와 맺는 관계들은, 스피노자라는 유령에게 안식처를 마련해주는 작업처럼 보인다. 이 철학자들은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중요한 중심 저자들일 뿐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스피노자의 사유를 갱신하며 스피노자 이후를 엿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더 이상 유령이 아니라 이들이 보여주는 정당한 계승의 관계 속에서 안식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이 계승의 첫머리에 오는 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다. 이 이론은 지젝의 오해와 달리 라깡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유물론적 상상계 이론으로부터 길어낸 것이다. 상상이란 지성의 허구적 착각이 아니라 인간 삶의 실재적 현실이라는 스피노자의 이론은 심지어 알튀세르를 넘어서, 이데올로기적 호명 안에서 예속적 주체화뿐 아니라 민주주의적 저항의 경향 또한 엿보게 만들기에 이른다(진태원).

다음으로, 네그리는 들뢰즈 이후 스피노자를 가장 적극적으로 전유하면서 그로부터 절대적인 다중의 역량에 기초한 긍정의 혁명적 정치학을 구성하고자 했던 철학자다.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1, 2부로부터 3, 4, 5부로의 이행을 신비주의적 형이상학으로부터 급진적 존재론으로의 이행으로 보는 독창적 해석을 통해 스피노자 연구의 갱신에 이바지한 바 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이러한 스피노자 해석에 기반해 제헌 권력, 다중 지성, 절대 민주주의 등 자신만의 독특한 정치철학 개념을 산출하면서 스피노자를 계승-극복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발리바르의 혁신적인 스피노자 독해는 자연학의 아포리아와 민주주의의 아포리아 간의 결합으로 흥미롭게 종합돼 제시된다(최원). 이 종합이 『윤리학』에 대한 새로운 독해의 가능성까지 열어젖히는 지점에 이를 때 논의는 단순한 소개를 넘어서 더욱 흥미로워진다. 여기에서 독자는 발리바르의 해석이 들뢰즈-네그리의 해석과 함께 현대 스피노자 연구를 갱신하는 강력한 해석적 원천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 연구의 총결산 보여주는 모로·토젤 대담의 의미

4부를 이루는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두 거장들인 피에르 프랑수아 모로, 앙드레 토젤과의 대담은 우선 기존에 공개된 글이나 대담의 단순 번역이 아니라 이 책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새로운 대담이라는 점에서 뜻 깊다. 내용면에서도, 스피노자 르네상스가 일어나던 당시 프랑스 스피노자학 및 철학계 전반에 대한 역사적 소묘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학술적 논의들을 담고 있다.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돼 수록된 모로와의 대담은 모로 자신의 스피노자 연구에 대한 일종의 총결산처럼 보일 정도로 다방면에 걸친 스피노자 연구의 생산성과 쟁점들을 집약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대 철학사의 학문적 전범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토젤과의 대담은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여러 쟁점들에 대한 명확한 지적들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넘어선 제3의 대안으로서 스피노자 정치철학의 여러 면모들과 가능성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이들과 함께 스피노자는 더 이상 유령과 같이 현대로 귀환하는 자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현재의 철학자가 된다. 이 현재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모로가 말했듯이, 실체-신 중심의 고전적인 체계 존재론의 틀을 벗고 ‘역사적 합리주의’(579쪽)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들과 모든 현상들을 각각의 역사적 인과 연쇄망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적 태도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합리주의로서의 스피노자 철학이 갖는 인식론적, 인간학적, 윤리학적, 정치학적 쟁점들과 가능성들을 여러 근현대 철학자들과의 대면을 통해서 가늠해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합리주의에 기반해 인간 정신의 동학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한 경향은 이 책에서 보여준 정신분석학과의 비교나 이데올로기론 및 정치철학으로의 확장을 넘어 현대 인지 과학과의 협력적인 동시에 갈등적일 수 있는 만남들에 열려 있다.

물론 여기에 수록된 작업들에 대해 아무런 의문과 의구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비교 연구들은 너무 작은 공통점에 주목함으로써 비교의 타당성이 흔들릴 수 있어 보이고, 어떤 연구들은 이전 해석가들의 작업을 비교적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치중해서 이론적 대결의 지적 긴장을 맛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수준의 집단적 연구가 하나의 책으로 기획돼 묶여 나오기까지 분명 오랜 기간 많은 이들의 노고와 집념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한국의 학문계와 출판계의 여러 척박한 상황들을 고려하자면 그 자체로 하나의 희망이다. 독자들은 스피노자를 현대 철학자들의 곁으로 불러내어 대화와 대결을 주선하는 이 책에서 자주 경험하기 어려운 지적 긴장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기획 의도에 부응하는 내실을 갖췄다는 것은 이 책의 두 번째 미덕이다. 세 번째 미덕까지만 세어보자면, 그것은 분명 올바로 매장된 스피노자 위에서 새로운 미래의 스피노자가 이 땅에서도 피어오르기를 기대하게 만든다는 데 있을 것이다.

주재형 서울대 강사·철학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공부한 뒤, 프랑스 파리의 고등사범학교(ENS)에서 「베르그손과 현대철학에서 정치와 형이상학 사이의 생명의 변증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공역), 『현대 프랑스철학』(공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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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2017-09-30 17:54:44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 현재가 존재한다. 그런데 현재라는 시간에 최소한의 기간이 있다면 현재 속에는 다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므로 현재라는 시간은 기간이 제로인 시간이어야 하고 그러면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도 존재할 수 없다.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통일장이론으로 우주와 생명을 새롭게 설명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노벨 물리학상 후보에 오른 대한민국의 유명한 과학자들(김정욱, 김진의, 임지순, 김필립 등)도 이 책의 이론에 대해서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