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8:15 (금)
학교폭력은 ‘갑질’폭력
학교폭력은 ‘갑질’폭력
  •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언어철학
  • 승인 2017.09.25 11: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로칼럼]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언어철학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은 잔인하다. 온 몸이 피투성이인 피해자 사진은 그 학생의 신체적, 정서적 손상이 얼마나 극심했을 지를 짐작하게 한다. 사진을 보는 우리의 우려와 염려가 깊어지는 것은, 학교폭력이 특정 지역의 우연성이 아니라 초중고 청소년에게 두루 퍼져 있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이란 학생이 타율적 힘에 의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불편, 손상을 겪는 것이다. 학교폭력의 폐해는 피해학생의 인격을 훼손하고 학교를 피하게 하고 자살을 생각하게 하거나 강요한다. 어쩌다가 학교사회가 이 지경까지 됐을까? 어쩌면, 학교폭력은 어른사회의 갑질 폭력을 모방하는 구조가 아닐까? 학생 개인 간에는 아직 선명한 위계가 구성되지 않았으므로, 집단을 구성해 약한 표적을 아래에 두는 위계를 구성해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아닐까? 

한 항공사 사주 딸의 소위 ‘땅콩 회항’ 사건은 갑질의 전형적인 경우이다. 모 프루덴셜 지점장의 자살사건, 어떤 군단장 가족의 갑질 사건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 곳곳에 알려지지 않은 어른들의 갑질은 허다하다. 많은 항공기 여승무원, 아파트 경비원, 건물 미화원, 백화점 직원, 간호사 그리고 직장, 식당,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갑질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최근 어떤 사회학 전공 교수의 경우처럼, 갑질은 지식 유무의 결과이기보다는 힘의 행사다. 영향력을 가진 자가 자기 편의를 위해 그렇지 못한 상대방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당한 힘의 사용이 한국사회의 주도적 인간관계를 구성해 온 것이 아닐까?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유학의 적극적 가치보다는 소극적 가치에 의존해 온 것 같다. 군자 통치법으로서의 학문을 추구한다는 명분하에 기능적 관계 질서를 남녀노소, 사농공상의 태생적 신분 사회구조로 편성해온 것이다. 이 구조에서 국민들 간의 갑을 관계는 불가피하다. 예를 들어, 술이부작(述而不作 전달할 뿐 짓지 않는다)이라는 명제는 성현만이 아니라 어른 그리고 1년이나 1기수 선배에게도 적용되는 질서 원리가 됐다. 어떤 말대답도 진위 여부를 떠나 불손의 지표가 됐다. 강자의 불법엔 침묵하고 약자의 인권을 침범하는 타성이 생겼다. 유학의 적극적 가치인 성기성물(成己成物 나의 이룸과 만물의 이룸은 하나다) 명제는 생활화되지 못한 것이다.

‘술이부작’의 위계구조를 어떻게 ‘성기성물’의 평등구조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인가? 먼저 술이부작의 갑질 구조는 한국어의 호칭어법에 고착돼 있다. 한국어법에서의 호칭은 거의가 사람의 기능적 직능의 이름이다. 회장, 사장, 국장 등의 ‘장’에서 시작해 직원, 승무원, 경비원, 미화원, 등의 ‘원’에 이르는 위계구조 상의 직책명이 호칭명이 된다. 그 많은 갑질의 구조적 근거다. 전문직인 법조계, 의료계, 언론계도 연수의 기수에 따른 위계화에 젖어 있다. 현재의 호칭어법은, 성기성물의 1차적 인간관계의 평등한 ‘님’이나 ‘선생’의 호칭이 아니라, 술이부작의 신분제 전통을 이어 받은 2차적 인간관계를 새로운 신분제로 고착하고 있는 것이다.

호칭어법에 들어와 있는 갑질적 폭력의 성향성은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유한양행은 회장부터 경비원까지 서로 ‘님’의 호칭을 사용한다고 한다. 국립암센터는 검진 받으러 간 필자에게 ‘선생님’이라 불렀다. 놀라서 살펴보니 다른 내방자에게도 같은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한국의 깨어있는 지성은 손물손기(損物損己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은 내가 손해를 입는 것이다)라는 가치의 빛에 따라 2차적 호칭이 아니라 1차적 호칭을 실천하는 것이다. 부산 여중생 피해자에게 한 언어분석철학자로서, 기성사회의 일원으로서 미안함을 표한다.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언어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