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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자의 품격
상급자의 품격
  •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 승인 2017.09.2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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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두 공영방송국의 일반 구성원들의 조직인 노동조합들이 ‘공정방송을 위한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하고 상당한 시일이 지났다. 지금 두 방송국이 방송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득한 옛날에 두 방송의 시청을 끊었기 때문에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파업 자체의 진행은 우리 사회의 ‘비정상의 정상화’ 또는 ‘적폐청산’의 추이를 보여주는 본보기로 삼아 살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노조의 파업과 퇴진 요구에 대해, 경영진은 ‘정치권력과 결탁해 합법적으로 선임된 경영진을 억지로 몰아내려는 불법적이고 폭압적인 것’이라고 반격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력과 언론노조가 힘을 합쳐 공영방송 장악에 나섰다는 주장은, 두 방송국의 지배구조가 새로운 집권세력의 즉각적인 개입을 불가능하게 해놓고 있는 점에서, 그리고 경찰력을 동원하고 일괄사표를 내도록 압박하는 등의 움직임을 볼 수 없는 점에서, ‘품위 없는 편가르기’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경영진이 그들을 지금의 그 자리에 앉힌 이전 정권의 방송 장악 ‘작전’을 염두에 두고 이런 조악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할만하다.

더하여 경영진은 언론노동자들의 파업이 ‘언론의 자유와 방송의 독립을 탄압하고 언론의 생명인 독립성과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거나 위협하는 행위’라고 공격하고 있다. 물론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불가결한 요소이며, 독립성과 공정성은 언론이 갖춰야 할, 그리고 언론사의 책임자라면 앞장서서 지켜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하지만 그 옛날 청와대의 홍보수석이 방송국 간부에게 “하필이면 또 세상에 KBS를 오늘 봤네, 국장님 나 한번만 도와줘”라고 압력을 행사할 때 그 방송국을 대표하는 경영진이 언론의 자유와 방송의 독립을 항변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듣지 못했다. 또 두 방송국의 기자들이 거리에서 ‘기레기’로 불리며 치욕을 겪을 때 그들을 지휘하고 대표하는 경영진이 언론의 책임과 방송의 공정에 관해 그 흔한 유감이라도 표명했다는 소식을 나는 듣지 못했다. 그런 과거를 가진 경영진이 느닷없이 언론의 자유와 방송의 독립을 내세우다니……. 그들의 손에서 언론의 자는 이제 공영방송이 진정성 있게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당장의 편익을 보호하려는 역겨운 구호로 전락했다고 하더라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지금의 경영진이 언론의 자유를 핍박하고 언론의 책임을 방기하는 데 앞장서 왔으며, 그러므로 언론이 독립성과 공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들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두 방송국 일반 구성원들의 주장이다. 이 주장에 대해 경영진은 “법과 절차에 따라 선임된 경영진을 교체하겠다는 것은 공영방송을 ‘勞營 방송’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대응하고 있다. 여기에는 노영 방송은 (아마도 경영진이 선호하는 상투어로) ‘좌편향’이 되어 공정성을 상실할 것이라는 악의적인 반격이 숨어 있다. 그렇지만 방송의 공정성은 언론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독립적으로 (가능한 한) 왜곡 없이 방송함으로써 실현해가는 것이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기계적 중립’ 같은 것을 통해 자동적으로 제공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 대응의 행간에서는 지금의 경영진이 공영방송을 ‘權營 방송’으로 만들었다는 自認을 읽어내는 것이 타당하겠다.

게다가 그동안 ‘법과 절차’를 앞세워 방송의 독립과 공정을 훼손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경영진이 ‘법과 절차’를 강조하는 것은 웃음거리라고 할만하다. ‘법과 절차’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전횡에서 권력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장치임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정당성이 취약한 권력이 위기에 몰리면 으레 ‘법과 절차’를 방패로 삼아 왔다. 지난 10여년간의 경험은 ‘법과 절차’가 언론의 독립과 공정성 확보를 위한 충분조건은커녕 필요조건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두 방송사의 경영진이 일반 구성원들에게 ‘법과 원칙’을 내세운다는 것은 그것 이외에는 그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방송사의 경영진이 그 지위를 유지하고 권력을 행사하려면 적어도 언론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신념에 관해서는 그 구성원들에게 의심받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구성원들에게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방송사 경영진이 구성원들을 동료가 아닌 적으로 삼고 저급한 억지와 핑계로 자리지키기를 고집하는 것은 그들 자신을 추잡하게 만들고 구성원과 시청자들에게는 고역을 안기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 경영진에게서 ‘상급자’로서 최소한의 품격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민낯을 보는 자괴스런 일이다.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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