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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화, 에도 막부 출신들의 기여와 협력이 밑받침됐다”
“일본 근대화, 에도 막부 출신들의 기여와 협력이 밑받침됐다”
  • 손일 전 부산대 교수·지리학
  • 승인 2017.09.21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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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메이지 유신』 손일 지음 | 푸른길 | 720쪽 | 42,000원

메이지 유신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260여 년 평화롭게 권력을 유지해온 도쿠가와 幕府가 서구 세력의 침입을 계기로 체제의 모순과 함께 스스로 무너진 것이라 볼 수도 있고, 겉으론 자주독립을 표방했지만 정권 탈취의 야욕에 불탄 雄藩 들의 하급무사들에 의한 무력 혁명이라 볼 수도 있다.
 
막부나 웅번은 외세 압력에 대한 대응에서 방법은 달리 했지만, 이들 모두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식산흥업에 의한 부국강병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해냈다. 막말, 메이지 초기 일본이 보여주었던 다이내믹은 그 시대 아시아 어느 국가도 보여 주지 못한 엄청난 것이었다. 나는 ‘인생 작업’으로 그 다이내믹을 내 식대로 정리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에 대한 아무런 대안도 없던 차에 우연히 들렸던 곳이 일본 혼슈 서남부 시마네 현의 쓰와노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쓰와노는 일본 근대지질학의 태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 일본 근대 대문호 모리 오가이(森鷗外), 일본 근대 대표적 철학자 니시 아마네(西周)의 고향이다. 돌아와서 세 사람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던 중 이들 각각과 연관이 있는 제3의 인물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에노모토 다케아키였다.
 
실제로 에노모토의 이력은 특별했다. 幕臣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근세 일본 최고의 지도제작자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의 내제자로, 이노가 죽은 후 완성한 ‘대일본연해여지전도’ 제작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에노모토는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막부의 북해도·사할린 조사에 참여했던 별난 이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에노모토는 네덜란드가 후원한 막부 최초의 근대식 군사학교인 나가사키 해군전습소를 졸업한 후 막부 해군병학교 교수가 됐고, 막부가 네덜란드에 주문한 최신예 군함 가이요마루(開陽丸)의 건조와 운용을 배우기 위해 네덜란드로 유학을 갔으며, 귀국 길에 가이요마루를 운행하면서 에도에 당도했다.

     결국 일본 근대화의 출발이라는, 그리고 동양 어느 나라도 성공하지 못한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계기가 된 막말과 메이지 초기의 다이내믹을
     에노모토의 삶보다 더 '리얼'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하지만 막부는 이미 웅번들의 힘에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대정봉환을 단행하면서 이제 하나의 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의 이력 중 클라이맥스는, 구막부 해군 부총재로서 가이요마루 등 8척의 군함을 이끌고 에도를 탈주해 북해도의 하코다테에서 정부를 수립했고, 선거를 통해 총재(대통령)가 된 후 신정부군과 일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에노모토의 일생이 끝났다면 보신전쟁(戊辰戰爭: 1868년부터 1869년 사이에 도쿠가와 막부 세력과 교토 어소에 정치 권력을 반환하기를 요구하는 세력과의 싸움으로, 일본에서 일어난 내전)에 참여한 어느 막신 중 하나 정도로 치부됐을 것이다.

신정부군에 맞서다 항복 … 사면 후 북해도 개척 참여

에노모토는 하코다테 전쟁에서 패한 후 항복했고, 2년 이상 투옥됐다가 적장 구로다 기요다카의 구원에 의해 사면을 받았다. 그 후 구로다가 장관으로 있던 북해도 개척사에 출사했고, 자신의 지질학적 능력을 발휘해 지하자원 탐사에 나서면서 북해도 개발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 후 사할릴-쿠릴열도 교환협정을 위해 주러 초대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에 파견되는 것을 시작으로, 해군경, 주청 특명전권공사, 이어서 체신대신, 문부대신, 외무대신, 농상무대신 등을 맡아 이름뿐인 정치 대신이 아니라 전문 테크노크라트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주재 공사 직을 끝내고 귀국할 당시, 그가 황망한 시베리아를 마차를 타고 횡단했다는 사실에 이르면 도대체 이 인간의 다이내믹은 어디까지인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또한 동경지학협회는 물론 일본전기학회, 일본기상학회, 일본화학공업학회, 가금협회, 식민협회, 식민협회, 러시아협회, 요업회 등 다양한 학술단체와 민간단체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과학자로서의 탁월한 능력과 리더십도 보여주었다. 결국 일본 근대화의 출발이라는, 그리고 동양 어느 나라도 성공하지 못한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계기가 된 막말과 메이지 초기의 다이내믹을 에노모토의 삶보다 더 ‘리얼’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더군다나 메이지 시대 인물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조선의 멸망과 관련돼 있는데, 그는 여기서 조금 비켜서 있었던 것도 매력적이었다. 또한 우리나라 저서나 포털 사이트 어디에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단지 몇 줄에 불과했기에 신천지를 개척한다는 자부심도 만만치 않았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승자의 역사인 維新史에서, 패적이라는 오명을 쓴 에노모토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고, 그에 대한 지면 할애 역시 인색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신사의 주역은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 ‘유신 3걸’을 비롯해, 요시다 쇼인, 다카스키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다카 등 모두 사쓰마와 조슈의 인물들이었으며, 산조 사네토미, 이와쿠라 도모미 등 궁정 실세들이었다. 이들 모두 조선의 패망과 직간접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었고 우리의 일본사는 대개 일본 관찬 역사를 그대로 소개하고 있기에, 각종 문헌에서 이들이 자주 언급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쇼군을 비롯한 막부의 인물들은 그저 시대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보수반동 그 자체로 평가되면서, 우리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쓰와노 여행을 계기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 유신은 쿠데타로 정치권에 화려하게 등장한 삿초 번벌 세력 뒤에 도쿠가와 막부 출신 테크노크라트들의 절대적 기여와 협력이 밑받침됐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결국 몇 해 전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번역 과정에서 잠재했던 편향되고 조악한 내 지식과 그 지식을 과시해보려던 나의 협량한 태도에 대한 반성으로, 260년 ‘도쿠가와 평화’를 이끌어 왔던 또 다른 집단, 다시 말해 敗者의 역사를 통해 메이지 유신의 또 다른 면모를 보고 싶고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년 2018년은 메이지 유신 150주년인 해다. 현재 일본의 원류, 다시 말해 하나의 통일국가로서 일본 특유의 정체성이 만들어진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봐야 할 것이다. 메이지 유신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메이지 유신을 정치적 야망을 가진 사무라이들과 국정에서 제외된 일부 지방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로 평가한다. 그 결과 정치와 문화는 권위주의적이고 천황 중심적이 됐으며, 해외 의존적 경제정책 때문에 국내시장은 위축되고 농민층은 도탄에 빠졌으며, 이를 돌파하기 위한 해외팽창 정책은 결국 50년 넘게 전쟁만 해대는 고약한 나라로 가는 발판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이 지닌 진보적 측면에 높은 점수를 주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가 더 많다. 즉, 비서양 세계 대부분이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팽창적 헤게모니 아래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반식민지 혹은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일본은 비서양 국가로는 최초로 1889년에 근대적 헌법을 채택했으며, 산업자본주의 경제로 변모하면서 획기적 경제발전을 이뤘다는 것이다. 어느 쪽 입장을 선택한다고 해도 메이지 유신이 지닌 시대사적 전환의 의미만은 변치 않을 것이며, 동아시아 근대 역사 나아가 우리의 근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주제임에 틀림없다.

2018년은 메이지 유신 150주년 해 … 일본 깊이 읽기 필요

사실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별 중요하지 않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또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와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의 인민들을 괴롭히고 있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원한다면,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에 대해 알아야, 아니 철저히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개별 국가뿐만 아니라 세계사 속의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가 이런 작업에 수고를 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역사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좀더 객관적인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역사적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고 또한 그들과 보다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일본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손일 전 부산대 교수·지리학 

영국 사우샘프턴대에서 지리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7년 2월 부산대에서 명예퇴직했다. (사)대한지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2015년에는 대한지리학회 학술상도 받았다. 퇴직을 앞두고 ‘인생 작업’이라는 각오로 다시금 메이지 유신이란 주제를 끄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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