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8:10 (금)
HK연구소와 새로운 시도
HK연구소와 새로운 시도
  • 이강재 서울대·중문학
  • 승인 2017.09.19 11: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술시론

나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최근 이야기를 해보겠다. 지난 7월 하순에 영국의 런던에서 세계수사학대회가 열렸다. 4일에 걸쳐 모두 298명이 논문을 발표한 큰 학회였다. 중국 漢나라 때 班固 32년~92년)가 쓴 「兩都賦」를 통해 고대의 도시 문제를 다룬 논문한 편이 발표됐다. 그런데 이 글의 공동 발표자는 중국고전 연구자와 건축학(도시학)을 전공하는 두 사람이다. 「양도부」라는 작품은 중국의 서쪽 수도인 長安(지금의 중국 시안)과 동쪽 수도인 낙양을부’라는 문학 형식을 통해 묘사한 것이다. 나에게는 매우 어려운 한자로 쓰여 있기도 하거니와 읽어도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고전학의 입장과 도시학의 입장에서 읽어가면서 도시를 기획할 때의 이념이 어떻게 반영됐는지를 설명하는 이번 글을 보면서, 나 역시 이 작품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9월 초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공자와 키케로’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학회에서는「공자는 중국의 키케로인가」라는 제목의 발표가 있었다. 일견 중국의 공자(B.C.551~B.C.479년)와 고대 로마의 키케로(B.C.106~B.C.43년)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발표는 동양의『중용』을 서양에서 라틴어로 역하면서, 키케로의 말을 가져와서 공자를 번역, 소개했다고 주장한다. 어느 번역이나 서로 문화적·사상적 차이가 있는 서적을 옮기면서 생기는 어려움이 있는데, 번역을 해나갈 때 해당 번역어를 쓰는 곳의 문화나 사상적 입장에서 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중국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한다면 라틴어 문화에 근거한 용어선택이 불가피할 것이고 그 점이 이 논문에서 중점적으로 언급됐다.

앞의 두 가지 사례에는 공통점이 있다. 연구자가 과거와 같이 고정된 분과 학문에 얽매여 있다면 나올 수 없는 융합적인 연구라는 점이다. 「양도부」는 일종의‘도시의 찬가’에 해당되는데 이런 작품이 동서양에 모두 적지 않게 남아있다. 그런데 그동안 서양의 로마와 라틴의 도시 연구는 고고학적 발굴만이 아니라 문헌자료에 대한 연구가 동시에 이뤄졌는데 비해 중국의 도시 연구는 고고학적 발굴에만 근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도시의 이념과 개념적 설계를 문헌학적으로 찾아낼 수 있다면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해석에서 더 많은 힘을 줄 수 있을 것은 분명하다. 또한 두 번째 언급한 키케로를 공자와 연관시킨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동서양의 사상은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주고 때로는 새로운 사고를 제시해주는 좋은 보물창고와 같은 것이었다. 동서양 사상 양쪽을 모두 잘 알아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누구도 쉽게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동서양 따로 놀기’를 넘어서서 융합적 연구가 이뤄진다면 여기서부터 나오는 창의적인 연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두 가지 사례의 또 다른 공통점은 위의 연구자 모두 내가 관여하고 있는 인문학연구원 HK사업단의 연구교수들이라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HK사업은 2007년부터 시작된 인문학 발전을 위한 장기프로젝트로서, 연구소를 기반으로 하여 그동안 미처 수행하지 못했던 다양한 연구를 통해 세계적인 인문학 연구소를 만들어내고 또 이를 통해 다양한 연구자를 양성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위에서 예로 든 두 가지는 학과 단위의 연구와는 다른 융합적 연구를 지향하는 HK연구소를 통해 얻어낸 수많은 긍정적 사례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전국의 43개 연구소에서 227명의 전임HK교수와 188명의 비전임HK연구교수를 통해 얻어낸 성과는 눈에 보이는 양적인 것만으로 논할 수 없는 매우 소중한 것이 많다. 왜냐하면 HK연구소들은 그동안 국내외 인문학 연구 담론과 방향을 선도하면서 ‘사회적 양극화’나 ‘4차 산업혁명’을 비롯한 사회적으로 시의성이 있는 의제를 선제적으로 연구해왔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두 편의 글 또한 HK사업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융합연구의 깊은 경지에 미처 도달하지 못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난 10년을 통해 앞으로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계기였으며, 향후 지속적인 지원이 이뤄진다면 한 층 더 진지하고 깊은 연구가 나올 것임에 분명하다. 지난 8월말로 HK의 10년 사업이 종료되면서 기존의 HK사업단이 새롭게 시작되는 HK+사업에 진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많은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특히 연구소 연구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 HK연구교수들이 당장 연구소를 떠나야 한다는 것은 매우 큰 손실이다.

인문학에 대한 지원은 단기적으로 어떤 큰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 10년의 지원만으로도 지금 보이는 정도의 큰 성과를 냈다면, 우리나라 인문학계의 잠재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이 연구소들이 지속적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할 때이다.

 

 

이강재 서울대·중문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