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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대선, ‘정치적인 것’의 절정
탄핵 대선, ‘정치적인 것’의 절정
  •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언어철학
  • 승인 2017.09.14 1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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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언어철학

* 지난 879호(2017-05-15)에 실렸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번 탄핵 대선에서 누구를 찍건 간에 ‘정치적인 것’의 참여자가 됐다. 국회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특위로 조사하고, 특검으로 규명하고 탄핵을 가결했다. 헌법재판소는 3개월 동안 심의해 2017년 3월 10일 전원 일치로 대통령을 파면했다. 탄핵의 힘은 파면의 이유를 제공한 당사자의 잘못에서 나왔다. 잘못이 보도된 작년 10월부터 탄핵을 지지하는 촛불집회가 사상 최대로 이어졌고, 이후 이를 반대하는 태극기집회가 나왔지만, 둘 다 절차를 크게 이탈하지 않으면서 대치 국면의 공론장을 만들어냈다. 대선까지, 근 7개월간에 표출된 시민적 성취는‘정치적인 것’의 절정이었다.

‘정치적인 것’은 많은 경우 혼란스럽다. 정치인들의 말이나 행동, 목표나 전략·전술이 불투명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자의적으로 옷을 벗어야 할 때가 있고, 타의적으로 옷이 벗겨지는 때가 있는 것이다. 옷을 벗는 일과 옷을 벗기는 일은‘정치적인 것’을 갈등상태로 만든다. 윤리성, 일관성, 충성심, 색깔론 등을 기준으로 한 판단이 나오고 인신공격이 판을 치게 된다. ‘정치적인 것’이 표면적으로 추잡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정치적인 것’의 부재는 더욱 절망적이라는 점이다.
‘정치적인 것’의 주적은 추잡성이 아니라 이에 대한 냉소주의나 절대주의일 것이다. 냉소주의는 정치가들에 게 요구하는 윤리성이나 논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소신이고, 절대주의는 상대방의 패러다임과는 통약 불가능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확신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논리증명이나 심산유곡의 성인 찾기가 아니라 시장에서 ‘장사하는 것’ 같은 것이다. 상황에 적응하고 협상해 최선을 거두는, 모두가 공존해 번영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절차 안에서의 격렬한 대립을 요구한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대립해 왔다. 보수는 북한 남침의 6·25가 남한 사회에 강요한 반공주의가 현실적 질서라야 한다고 하고, 진보는 정전회담을 수용하는 공존주의가 현실적 질서라야 한다고 한다. 두 관점은 격렬하게 대립할 때도 있지만 사안에 따라 협상하고 조절하는 ‘정치적인 것’의 문법을 추구해 왔다. 따라서 호주제 대안, 최저임금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에 대해 절충적 합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스스로를 정의해 가면서 나타내 보이는 제도적 과정이다.

‘정치적인 것’은 국가존립, 국민공존, 사회번영을 최대화하는 문법구성이다. 인간 개개인은 그 심성 작용의 소망에 따라 살아가지만 각 개인이 경험하는 심성 내용은 그가 속한 국가 언어, 헌법, ‘정치적인 것’에 따라 구성된다. 그리고 정치 언어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정치적인 것’의 정당성은 국민들의 공동체에서의 소망, 도전, 모험, 실험, 경쟁을 통해 민주적으로 수렴돼 결정된다. ‘정치적인 것’은 권력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새로운 질서라는 창작품을 만들어 내는 절차적 행위다.

탄핵 대선에서 나타난 ‘정치적인 것’은 국정중단의 아픔을 수반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한반도 6자 관계에서 당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 아픈 것은 ‘탄핵을 하지 않았더라면 달랐을까’라는 의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위안은 우리 국민 모두가 촛불집회나 태극기집회를 통해 ‘정치적인 것’에 참여해 적극적 시민이 되고 정치인이 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당사자뿐 아니라 당사자를 검증하는 데 실패했던 유신 프레임의 사유 방식을 거두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보수도 이제 유신의 프레임에서 벗어난다면 건강하고 강력한 보수가 돼 진보와 함께 보다 진정한 ‘정치적인 것’의 문법을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탄핵 대선은 “한국의 ‘정치적인 것’이 더 큰 창작을 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인 역사적 예술작품이 됐다.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언어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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