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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강의를 좀먹는 ‘불법’의 유혹
[데스크 칼럼] 강의를 좀먹는 ‘불법’의 유혹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9.13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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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이런 말이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다.” 자원이 빈약하던 시절의 추억이 가득 담긴 말이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던 시절이니, 그렇게 해서라도 공부하려는 행위를 가상히 여겨 책을 훔치는 행위를 관대하게 바라보던 정서가 이해된다. 이제는 시절도 달라졌다. 책은 더 이상 귀한 물건이 아니다. 그저 실용적인 ‘지식툴’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2학기 개강 이후 대학 곳곳에서 이상한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경기도의 한 대학 구내 서점에서 교양강의 교재가 한 권도 팔리지 않아 알아봤더니 학교 앞 복사가게에서 ‘불법 복사본 교재’를 박스 채로 팔고 있는 걸 목격했다. ‘불법’이 판치고 있는데, 대학도 구내서점도 뾰족한 해법이 없다고 발을 구른다.

뿐만 아니다. 서울의 K대에서는 교재 불법복사와 관련 학생 2명을 112에 신고해 경찰이 입건했다. 또 다른 K대에서는 112가 출동해 복사업자를 입건하기도 했다. 어떤 곳에서는 교재 불법복사 예방과 단속을 위해 대학에 진입하는 저작권보호 관계자들을 학교 측이 완력을 써 아예 접근을 막는 일까지 있었다.

개강하자마자 학생들이 ‘교재’ 때문에 잠재적 범법자가 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물론 교재값을 부담으로 여긴 학생들에게 일차적인 문제가 있지만, 이런 사태는 예견된 것이어서 학생들에게만 그 책임을 따지기도 어렵다.

해마다 학기마다 반복되는 이 지루하고 궁핍한 ‘불법복제’를 대학들이 모를 리 없다. 공들여 만든 책들이 허무하게 ‘불법복제’ 당하는 이 위협적인 현실 앞에서 출판사들의 선택도 제한적이다. 직접 고소해야 하는데, 이 일도 결코 녹록치 않다. 수업을 진행하는 교·강사들은 지정된 교재가 아닌, ‘불법복제’된 교재임을 뻔히 알면서도 강의평가다 뭐다 해서 학생들 눈치를 살피느라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 일부 대학은 불법복제를 조사하려는 이들에게 완력을 행사해 현장 접근을 가로막고 있기까지 하다. ‘불법’은 도처에 있는데, 누구 하나 나서서 이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불법복제는 대학가의 풍경마저 바꿔놓고 있다. 대구의 한 대학 앞에는 제법 많은 서점들이 책을 팔고 있었다. 그 서점들이 하나둘 사라져 지금은 단 두 곳만 남았다고 한다. 이 두 서점 주변에 문 닫는 서점보다 더 많은 복사가게들이 문을 열고 영업을 하고 있다. 이 기묘한 풍경은 대구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광주, 대전, 부산, 서울 등 대학가라면 어디서든 만나게 되는 모습이다.

1980년대 초반 대학가의 미팅 현장에는 제법 두툼한 책을 가슴에 안은 여학생들이 자주 보였다. ‘지적인 모습’에 대한 동경이 꼭지점에 있던 시절이었다. 이제 학생들은 책을 가슴에 안고 다니지 않는다. 뭐, 시대의 변화니까 이해할 수 있다. 디지털시대로 진입했고, 강의실 풍경도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그렇다고 ‘불법복제’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불법’이고 그것이 교육적으로도 정당한 것이 아니라면 대학은 어떻게 이 문제에 맞서야할까. 112 경찰차가 오고, 학생들이 입건되고, 복사업자가 끌려가는 풍경이 2017년 가을 한국 대학에서 빚어지고 있는데, 여전히 사소한 문제, 지엽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으로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다. 한 인격의 전문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강의가 언제까지 이렇게 ‘불법’의 유혹 앞에 위태롭게 서 있어야 할까. 대학과 교·강사들에게 먼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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