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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성 단속과 ‘세종도서’로 이중고 맞은 학술출판
일회성 단속과 ‘세종도서’로 이중고 맞은 학술출판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7.09.12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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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_ 학술출판이 미래를 만든다: ⓻ 반출판 정책들
한국저작권보호원에서 열린 ‘출판 저작권 보호 민·관 2차회의
안산대 앞 복사집에서 볼법복제해 패키지로 판매하다 적발된 교재 제본물
▲ 한국저작권보호원에서 열린 ‘출판 저작권 보호 민·관 2차회의

안산대에서 불거진 불법교재 문제는 비단 복사가게만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한 정황이 보여 문제가 더 크다. 교재는 안산대에 단독으로 공급되는 교재였다. 구내서점 측은 단 한 권도 판매되지 않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불법복제 된 교재를 들고 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한 학생을 통해 과대표가 나서 복사집과 거래를 텄고, 제본한 2권의 교재를 5천원에판매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방이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었다. “경북대를 담당하고 있는데 서점이 많이 줄었습니다. 구내서점이랑 학교 밖 경대서점 말고는 없어요. 그런데 그 옆에 복사집만 70곳이 넘습니다. 복사집이 강의계획서를 보고 교재를 구입해서 스캔한 파일을 갖고 있는 거죠. 학생이 와서 교재를 달라고 하면 바로 파일을 복사해서 줍니다.”경북권역을 담당하는 한 대학교재출판사 담당자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광주보건대(총장 정명진)에서도 출판사에 수시로 복사집에 대한 제보를 해 그때마다 한국저작권보호원에 신고를 한다고 말했지만 단속 말고는 뚜렷한 해법이 없는 실정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한국저작권보호원이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단속해서 수거한 불법복제물을 쌓아두는 것이 끝이다. 한 번 단속은 할 수 있지만 예방이나 사후 조치가 없다. 형사고발도 하지 않는다.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이란다. 복사집을 약식기소 해도 벌금 50만원 내고 계속 영업하는 것이 현실이다. 주로 대학교재를 출간하는 출판사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는 지점이다.

한국저작권보호원 단속의 한계

사실 불법복제를 근절하기 위한 출판사들의 노력은 오래전부터다.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윤철호)가 1982년부터 지속적으로 계도와 단속활동을 주도해 온 것. IMF 사태 이후 환율 상승으로 저작권료가 두 배로 뛰면서 대학가에서는 불법복제물이 많아졌다. 매학기 1천부 가량 팔리던 학술도서의 판매부수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단속 강화와 고소가 지루하게 이어졌고 결국 2000년에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회장 권대우),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회장 주종남) 등의 단체가 출판물의 복사 및 전송에 관한 권리를 위탁받아 관리할 ‘한국복사전송권관리센터’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한국복제전송권협회(이사장 정홍택, 이하 복전협)의 전신이다. 그렇게 복전협은 개강 시즌이면 대학가를 돌면서 불법복제물을 집중 단속해왔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다는 것이 출판계의 오래된 지적이다.

법적 권한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한국저작권보호원도 일회성 단속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고, 대학이나 교강사들도 적극적이지 않다. 결국 출판사가 자구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다. 좋은 저자를 찾고, 책 잘 만들어서 시장에 내놓으면 되는 ‘출판사의 기본 역할’이 헝클어지고 있는 건, 아무리 봐도 바람직한 ‘출판 여건’이라고 할 수 없다. 반출판 정책은 따로 있지 않다. 이렇게 사기를 꺾고, 쓸데없는 일에까지 나서게 만드는 게 바로‘반출판 정책’이다.
 
그래서일까. 위탁단속 정도로 대응하던 출판업계는 조직적으로 움직이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고 있다. 김효중 한국대학교재출판사협의회장(라이프 사이언스 대표)는“한국학술출판협회와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위기상황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출판사들이 행동에 들어간 것이다”라고 말했다.

▲ 안산대 앞 복사집에서 볼법복제해 패키지로 판매하다 적발된 교재 제본물

지난달 23일에는 한국저작권보호원에서 출판관련업계 관계자들이 모여 출판 저작권 보호 민관 2차회의를 열었다. 이날 한국저작권보호원 현장대응국 오프라인총괄팀은 9월 한 달간 전국 대학가 약 2,500개 복사·인쇄업소를 집중단속 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저작권법 위반에 관해서는 전국 400여개 대학에 공문을 보내 단속 관련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세부적인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교직원 및 학생들이 저작권자 허락 없이 도서를 복제하는 행위가 저작권법 위반 행위임을 알리는 것, 한국저작권보호원의 협조요청 문서를 대학 내 게시판, 신문, 홈페이지에 게재하는 것, 마지막으로 대학 복사업소에 대한 불법복제 근절이다. 이를 위해 한국저작권보호원은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영리를 목적으로 도서 등을 복사하는 행우는 저작권자의 고소 없이도 저작권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절판도서 포함)과 최근 성행하는 전자책 파일 형태의 ‘북스캔’ 서비스도 저작권법 위반임을 안내할 예정이다. 대대적인 이번 캠페인이 또 다시 일회성 이벤트로 그칠지 지켜볼 일이다.

‘세종도서’로 두 번 운 학술도서출판사들

한국저작권보호원이 대학가 불법복제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동안 학술출판사를 좌절하게 만든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학술출판사들에게 가뭄의 단비 같았던‘우수학술도서 선정사업’이 그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세종도서’로 변경된 것이다.

2013년‘공감도서’선정사업으로 변경될 때까지만 해도‘우수도서 보급’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었지만 2014년부터 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국민이 ‘공감’할만한 도서 330여종을 선정하는데 예산이 기존 우수도서 지원사업과 통합된 것이다. 그렇게 ‘우수학술도서 선정사업’은 ‘공감도서’를 거쳐 ‘세종도서 지원사업’으로 최종 안착된 상태다.

김진환 한국학술출판협회장(학지사 대표)는 “‘세종도서 지원사업’정책이야말로 가장 납득하기 어렵고 제도적으로 역행한 사례”라고 비판한 바 있다. 우수학술도서 선정사업은 국가에서 기초학문의 발전을 위해 대중들이 잘 사지 않더라도 학술도서라면 안정적으로 출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좋은 취지의 사업이었다. 하지만 공감도서, 세종도서로 명칭이 바뀌면서 학술도서보다는 대중교양서를 위한 정책으로 변질됐다는 것.

학술도서와 교양도서는 분명 공통분모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학문적 가치가 높은 책이 많이 출간될 수 있도록 지원해주자는 취지는 사라지고, 대중서를 지원해서 예산의 효용성을 높이자는 주장이 나오면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게 출판계의 지적이다.

모두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말한다. 인공지능, VR, AR, 3D 프린팅 등 새로운 영역에서 저작권보호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토양은 무엇일까. 기초학술서들이 그 하나일 것이다. 학술출판사들이 힘겨워 하는 건, 바로 이런 토양을 가꾸는 이들을 자꾸 위축하게 만들고, 사기를 꺾고, 심지어는 전혀 다른 일에까지 매달리게 하는 거꾸로 가는 반출판 정서들이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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