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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쟁점 : 이해받지 못한 업적, 또는 제2의 지적사기
과학쟁점 : 이해받지 못한 업적, 또는 제2의 지적사기
  • 안성우 과학객원기자
  • 승인 2003.01.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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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들어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 간의 ‘과학전쟁’ 와중에, 물리학자 앨런 소칼은 1996년, ‘소셜 텍스트’지 특집호에 ‘경계선을 넘나들기: 양자 중력의 변형적인 해석학을 위해서’라는 난해한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다. 일견 인문학자들을 옹호하는 과학자의 심오한 입장을 보여주는 듯했던 이 논문은,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날조된 것이었다. 당시 소칼과 많은 동료 과학자들은 엉터리 논문을 구별하지 못했던 ‘과학에 무지한’ 인문학자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최근 물리학계 내에서 심상치 않은 소문이 퍼지고 있다. 날조된 논문으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인터넷 상에서 퍼지기 시작해 올해 10월 23일, 급기야 물리학 온라인 토론그룹(sci.physics.research)에 ‘역 소칼 날조에 당한 물리학?’이라는 주제의 토론게시판까지 개설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게시판에서 이 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으며, ‘뉴욕 타임즈’, 영국의 ‘레지스터’, 독일의 ‘차이트’, ‘Nature’, ‘인디펜던트’,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 등 학술지 및 대중지에서 차례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날조된 논문의 저자로 의심을 받고 있는 사람은 올해로 쉰 셋 나이의 프랑스 물리학자 이고르 보그다노프와 그리츠카 보그다노프 쌍둥이 형제다. 이들은 프랑스 텔레비전의 과학관련 프로그램을 1980년부터 십여년 간 진행하는 한편 프랑스 철학자 장 귀통과 함께 ‘神과 과학’이라는 베스트셀러를 1991년 출간하는 등 저널리스트이자 공상과학소설가로서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1993년부터 수리물리학을 전공으로 학위논문을 준비해, 그리치카는 1999년 프랑스 부르고뉴 대학에서 수학박사학위를 받은 반면, 이고르는 당시 논문심사에서 탈락해 올해 7월 같은 대학에서 물리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들은 10~33cm보다 작은 규모의 초기 우주를 설명하는 데 기존의 수학적 방법이 적합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방식의 적용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 후, 초기 우주의 시공간적 특이성을 다루는 데 있어 위상학적 장이론에서 해결되지 못한 난점을 ‘특이성 불변량’이라는 새로운 위상학적 지표의 도입을 통해 해소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과학적 연구 혹은 날조된 논문?

그러나 이들이 박사학위논문과 관련해 공동으로 몇몇 저널에 제출, 출간된 논문 네 편(이고르 보그다노프 단독 논문 한 편 포함)이 날조된 것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소문이 인터넷에서 퍼지면서, 이들의 논문에 과학자사회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인터넷 상에 떠돌던 루머를 공개된 게시판에서 논쟁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문제의 공론화에 가장 앞장선 사람은 존 바에즈 캘리포니아대 교수(리버사이드, 수학물리학 전공). 그는 토론게시판의 글을 통해 “이 루머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이 분야의 전문용어를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봐도 이 논문들은 횡설수설하는 말임이 틀림없다”며, 일부분은 맞지만 어떤 부분은 전문용어를 쓰고 있을 뿐 전혀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채워진 글이 저널에 실렸다고 비판했다.

콜럼비아 대학의 수리물리학자 피터 워잇도 이들의 학위논문과 저널에 실린 논문들은 명백하게 말도 안되며, 심사 상의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들 형제가 스스로 진정 과학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소칼 식의 사기를 하는 것인지가 정말 흥미로운 문제”이며, “소칼의 날조가 과학학 연구자들에게 유익한 경험이 됐듯, 이 문제가 물리학 분야에 미칠 영향도 유익할 것”이라고 게시판에 썼다.

형제들의 반박과 의혹들

보그다노프 형제는 이런 논란에 대해 자신들의 연구는 진지했으며, “자신들의 논문이 날조라면 논평자들은 과학적인 증거를 통해 이를 증명해야 하며, 자신들의 연구가 사리에 맞지 않다면, 이를 구체적인 수준에서 증명해야 한다”고 항변하고 있다. 아직도 자신들의 아이디어가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기실 문제는 이들의 박사학위 논문의 통과과정에서부터 예견된 것이었는데, 크로니클지는 지난달 15일자에서 논문의 지도교수인 부르고뉴 대학의 슈턴하이머는 그리츠카 씨의 박사학위 논문은 1999년에 조건부로 통과된 것이며, 자신은 그 논문의 모든 면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는 아니라는 언급을 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이고르 씨의 경우 박사학위 논문 통과의 조건이 동료심사제로 운영되는 저널에 논문 서너 편을 싣는 것이었으며 바로 그 논문들이 지금 문제가 된 것이다.

이들이 소칼 식의 날조를 할 생각이 없었다면, 왜 이런 논문을 제출했어야 했는지에 대해 크로니클지는 또다른 이해관계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들이 저술한 베스트셀러의 표절시비와 관련된 법정에서의 공방이 이들에게 박사학위 획득을 서두르도록 한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언론의 보도가 상당히 이루어진 지금 온라인 토론 게시판에서의 논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논쟁 와중에 직접적인 비유의 대상이 된 앨런 소칼, 그리고 과학학 분야에서 잘 알려진 해리 콜린스 교수 등이 논쟁에 참여해 ‘과학을 시험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날조’에 대한 짧은 논박을 주고받는 등 여전히 ‘과학논쟁’의 기운이 느껴지는 여러모로 논쟁적인 글들을 게시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현재 보그다노프 형제의 논문은 일방적으로 날조라고 비난받고 있지 않고 있다. 날조라는 의혹만큼 이들의 문제제기가 다른 이론적 논문들의 그것들처럼 토론가능한 것이며, 지금의 사태는 이들의 논문이 성공적이었음을 반증한다는 의견 또한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은 이론적인 수리물리학계에서 일어난 특수한 상황으로 치부하기 힘든 면이 크다. 보그다노프 사건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날조를 과학계의 동료심사를 통해 어떻게 구분할 것이며, 그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제대로 심사할 동료가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도 계속될 수 있는 학문의 발전을 누가,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등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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