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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전통의 지혜 '서합괘' … 소통과 법치의 민주적 리더십 주문
동아시아 전통의 지혜 '서합괘' … 소통과 법치의 민주적 리더십 주문
  • 윤석민 건국대 아시아디아스포라연구소·철학
  • 승인 2017.09.07 1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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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38. ‘한 데 섞임’에 관한 『주역』의 지혜

지난 겨울에서 올봄까지, 우리가 사는 이곳은 대립과 마찰이 잦았다. 촛불과 태극기의 不和가 나라 안을 채운 듯 했고, 선거를 둘러싼 葛藤은 나라 밖의 문제까지도 집어삼기며 몸집을 끼우는 듯 했다. 존망의 경계를 향해 치달리는 듯 보이는 不和는 아쉽게도 아직 진행 중이다. 그 대립과 마찰이 서로 섞일 수 없는 상황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부딪치며 한 데 섞일 그 방법을 찾아 나섰던 지난 겨울과 봄이었다. 촉급한 국내외 정치경제의 문제를 두고서, ‘한 데 섞임’이라는 원론적인 얘기를 한다는 것이 너무 태평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좀 더 태평한 세상을 바라는 마음에, 섞임에 관한 동아시아 전통의 지혜를 불러내고자 한다.  

대립에서 화해로, 그리고 '섞임'

대립과 마찰이 화합과 화해로 나아가자면, 우선 ‘섞임’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섞임’에 관한 전통철학 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주역』은 복잡한 인간사를 64개로 범주화한 경전이다. 『주역』의 서합(噬嗑)괘는 우리에게 그 ‘섞임’에 관한 지혜를 전하고 있다. 서합괘는 『주역』의 21번째 괘로서, 송대 역학가 邵雍(1011~1077년)의 直年卦法(매년에 해당하는 괘를 정하는 법)에 따르면, 2017년은 바로 ‘섞임’의 괘, 서합괘에 해당한다. 오른쪽 그림에서와 같이, 세 개의 양효(−)와 세 개의 음효(--)로 위아래로 섞여 이뤄진 괘로서, 아래는 진괘이고, 위는 리괘로 이뤄진 괘다. 서합의 噬는 이로 깨문다는 의미이고, 嗑은 (입안의 내용물을) 합한다는 의미다. 즉 서합은 ‘깨물어 섞이게 함’을 의미하는 괘다.
 
중국 唐나라의 孔穎達(574~648년)은 서합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입안에 위아래로 나뉘어 잘 섞이지 않는 물질들이 있다면, 치아로 물고 씹어 그 물질들을 하나로 잘 섞이게 해야 하는 법이니, 만일 그렇게 됐다면, 형통할 것이다”라고 그 대의를 풀이했다. 치아의 저작(咀嚼)으로 입안의 물질들이 잘 섞이게 된다는 물상의 비유를 들어, 서합괘는 대립과 마찰을 빚었던 대상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화합한 결과, 형통하게 된다는 인간사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치아의 작용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주석서들은 치아의 저작 작용을 “옥사를 씀이 이롭다(利用獄)”는 괘사에 근거해서, 법에 근거한 獄事라고 풀이한다. 옥사는 군주의 통치행위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정치행위를 의미한다. 요컨대, 서합괘는 법에 근거한 군주의 정치행위를 통해서 ‘이질적인 것들의 서로 섞임’을, 나아가 상호 간의 소통과 그 형통함의 과정들을 소개하고 있다.

서합괘에 대한 후대의 해석서는 서합괘를 공동체 형성과 소통의 장이라는 의미로 확장시켜갔다. 「계사전」은 서합괘에 대해 “(군주가) 한낮에는 시장을 열어 천하 백성을 오게 하고, 천하의 재물을 한 데 모이게 하여 재화를 교환하게 한 뒤에 돌아가게 했으니, 이렇게 사람들은 각각 그 필요한 바를 얻게 된다”라고 적고 있다. 즉,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공동체 속에서 재화를 구매하고 교환하는 소통과 교류의 장으로 서합괘의 의미를 밝힌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서합괘 괘상의 윗부분에 위치한 離卦가 중천에서 세상을 밝히는 해를 상징하고, 아랫부분에 위치한 震卦가 움직이며 나아감의 상태를 상징한다는 『주역』의 象數적 해석에 근거한다.

나아가 서합괘는 공동체 구성원이 한 데 섞여 소통하고 화합할 수 있게 하는 통솔자로서의 군주와 그 정치행위의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 서합괘에서 군주는 독재자, 폭군, 독재 등과 같은 카리스마적 리더와는 거리가 있는 민주적 리더쉽을 갖는 존재로 설정돼 있다. 괘상에서 아래로부터 다섯 번째는 강건한 군주의 자리(陽의 자리)인데, 그 곳에 陰爻(--)가 자리하고 있다. 양은 강건함의 특징인 반면 음은 유약함이 특징이기에, 서합괘의 군주는 유약한 군주로 풀이되곤 한다. 유약한 군주는 자신의 강건하지 못한 위상을 잘 알고 있기에 언제나 신하들과의 소통 속에서 정사를 결정해야한다고 말한다. 즉, 권력과 권위에 의존한 독단적·정치적 행위보다는 유연한 소통의 정치행위로 공동체 내의 화해를 이끌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민주적 리더십의 군주가 유연한 소통만으로 이질적인 것들을 한 데 서로 섞이게 할 수 있을까?  『주역』은 이러한 군주에게 옥사의 형법을 강행해야한다고 주문하면서, “유약한 자가 중앙의 높은 자리에 있다. 이것은 자신의 마땅한 지위가 아닐 것이지만, 그래도 옥사의 형법을 강하게 집행하는 것만이 모두에게 이롭다”라고 적고 있다.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다툼을 잠재우기 위해서 물고 씹어 한 데 섞이게 할 치아의 작용이 있어야하듯, 공동체의 소통과 화해를 위해서는 강력한 법치의 실천이 있어야함을, 『주역』은 민주적 리더십의 군주에게 주문하고 있다. 그런데, 유약한 군주가 강력한 법치를 실현하기란 쉽지 않기에, 서합괘는 군주에게 자신의 도덕, 상대와의 소통, 공동의 법치 등의 조건들을 제안하고 있다.
 
2017년 한국사회에서 서합괘의 해석

서합괘는 2017년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첫째, 법치는 소통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괘상()의 다섯 번째 자리, 즉 리더의 자리는 끊임없이 상하의 자리들과 왕래하며 소통하는 위치다. 왕래하고 소통하는 대상은 강력한 정치권력들로부터 일반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다양한 소통 대상 중 리더의 편에서 조력하는 정치권력자는 서합괘에 등장하지 않는다. 서합괘의 리더는 그렇게 약한 정치권력을 가지고 각 계층과 소통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서합괘는, 공동체의 리더라면 마땅히 사회 각 계층과의 왕래 소통을 통해서 정치적 지지를 얻어 강력한 법치를 시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통은 법치를 실현하고자하는 리더의 기본적인 자세이자, 법치의 전제다.  

둘째, 법치의 실현과정에서 소요와 충돌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들의 서로 섞임’의 지향 속에서, 리더는 소통대상들과 잦은 다툼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섞임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딪침, 법치의 실현에서 노정되는 다툼은 ‘섞임’의 지향 속에서 등장하는 것이기에, 그 다툼은 리더에게 허물이나 과오로서의 凶兆가 아닌, 섞임을 방증하는 과업이나 진실로서의 吉兆라고 서합괘는 말한다.

셋째, 법치는 근본적으로 도덕에 근거해야한다는 것이다. 서합괘의 괘상()에서 아래로부터 다섯 번째 자리는 연약하지만 中道의 덕을 갖춘 리더의 자리다. 여기에 자리한 리더는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은 채, 상하좌우의 모두가 기준으로 삼아도 될 자리를 지켜가며, 올곧은 도덕적 가치를 법치로 실현해내는 존재가 돼야 한다. 서합괘는 中道를 벗어난 법치로부터 정치적·사회적 역경과 혼란의 상황이 야기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서합괘는 지금의 최고 권력자에게 中道의 덕을 가지고 강력한 법치를 행하라고 주문한다. 평상의 정사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강력한 법치를 시행함에서의 中道는 법치의 공정성이다. 

넷째, 법치는 시의성에 부합해야한다는 것이다. 괘상()의 다섯 번째 자리에 처한 리더는 음효로서 유약한 존재이지만, ‘깨물어 섞이게 함’을 실천해야하는 때에 처하고 있다. 서합괘는 유약한 리더라고 해서 언제나 유약함으로만 상대와 소통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즉, 때와 상황의 변화에 적합하게, 과하거나 모자라서 공동체의 원망을 사지 않게끔, 법의 공정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강폭한 자에게는 조금 강하게 유약한 자에게는 조금 약하게 법을 집행해야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서합괘는 법치에 관한 지혜를 전하고 있다. 서합괘는 법치의 목적이 이질적인 것들의 서로 섞임에 있음을 전제로, 리더의 강력한 법치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나라 안의 갈등뿐만 아니라, 남북의 갈등을 넘어 이웃 나라와의 갈등에서도, 서합괘의 지혜는 유효하다. 하지만, 강력한 법치로만 통합된 사회는 공동체의 영속을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주역』은 섞임의 괘인 서합괘 뒤에 꾸밈의 괘인 비괘(賁卦)를 두고서, “이질적 사물들을 억지로 섞여있게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이들이 화해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아름답게 문식해야한다”라고 말한다. 즉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섞인’ 공동체의 지속을 위해서, 섞임을 이어갈 문화적 화합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주역』이 말하는 ‘때에 맞게 변화함’의 지혜다. 깨물어 섞이게 하는 이 시기가 지나면, 섞인 것들을 조화롭게 꾸며야하는 그 시기가 올 것이다. 때에 맞게 변화한다면, 때에 맞게 섞이고 꾸밀 수 있을 것이니, 그 안에서 공동체의 소통과 조화가 지속될 것이다.

 

윤석민 건국대 아시아디아스포라연구소·철학

베이징대 철학과에서 양한위진시기 역학과 철학의 변화에 연구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역연구와 한중철학비교에 관한 연구를 통해 동아시아 전통철학의 현재적 의의를 탐구하고 있다. 저서로 『王弼易學解經體例探源』가 있고, 역서로 『역학 철학사』(전8권)(공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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