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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진화론에서 이휘소의 표준모형까지 … 과학이 쉬운 언어로 대중에게로 왔다.
다윈 진화론에서 이휘소의 표준모형까지 … 과학이 쉬운 언어로 대중에게로 왔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9.07 16:3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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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제16강 ~ 제21강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의 2017년 강연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은 8월 19일 강연으로 과학/과학철학 섹션을 마무리 지었다. <교수신문> 휴간 기간과 겹쳤던 문화의 안과 밖 주요 강연들을 지면에 요약, 발췌했다.
강연은 제16강 「다윈과 왓슨의 패러다임에 대한 갱신과 지속」(이준호·서울대, 7월 15일),  제17강 「프리고진, 복잡계의 이해」(신국조 UNIST 석좌교수, 7월 22일), 제18강  「맥스웰, 아인슈타인, 그리고 빛의 패러다임」(이필진·고등과학원, 7월 29일), 제19강 「볼츠만, 확률과 통계의 과학」(이덕환·서강대, 8월 5일), 제20강 「하이젠베르크와 양자역학」(임채호·서강대, 8월 12일)」, 제21강 「가모브와 이휘소, 우주론과 표준모형」(남순건·경희대, 8월 19일)이다.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의 과학/과학철학 섹션은 6월 10일 이문규 전북대 교수의 「조지프 니덤과 동양의 과학」을 첫 강연으로 해서 모두 11강으로 진행됐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윈이 없었다면 진화론은 탄생하지 않았을까? 멘델이 없었다면 유전학의 씨앗은 뿌려지지 않았을까? 왓슨과 크릭이 없었다면 DNA 구조는 밝혀지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결단코 ‘아니다’이다. 다윈과 동시에, 어쩌면 조금 먼저 월리스는 거의 동일한 진화론을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었고, 멘델 사후에 세 명의 유전학자에 의해 멘델의 발견이 재발견됐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DNA 구조를 이중나선이라고 풀어내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뛰어난 천재도 필요하겠지만 ‘시대정신’으로서 나아가는 집단지성의 힘으로 이뤄지는 탓이리라.
 
왓슨과 크릭의 DNA 구조 발견으로 DNA에 담겨 있는 정보가 어떻게 실행되는지, DNA 자신은 어떻게 복제되는지 등이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질문들이 됐고 그 외의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도전이 진행됨으로써 현대 생물학의 역사를 1953년 이전과 이후로 쪼갤 수 있을 정도의 변화를 견인했다.

1963년은 왓슨과 크릭 논문이 나온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분자생물학은 대장균과 박테리오파아지를 소재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크릭과 같은 연구실을 쓰고 있던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 박사는 분자생물학의 미래에 대한 대담한 제안을 새롭게 하게 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분자 생물학은 DNA 정보를 풀어내는 과정을 머지않아 다 완성하게 될 것이고, 생물학의 미래는 발생과 신경계라는 미지의 세계를 밝혀나가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대담한 제안은 모델 생물에 대한 연구의 기폭제가 됐고 전통적으로 좋은 소재이던 초파리 모델에 더하여 예쁜꼬마선충 모델이 세상이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1963년에 시작한 연구의 결실로 1974년 한 편의 논문이 <제네틱스(Genetics)>(유전학회지)에 발표됐고, 그 논문이 이후 브레너 박사의 노벨상 대표 논문이 된다.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도 브레너 박사의 제안은 전혀 구시대적 냄새를 내지 않으면서 유효하다. 그만큼 발생이나 신경계라는 오묘한 생명 현상에 대한 실체란 알아내기 힘든 것이다.

다윈과 왓슨으로 대표되는 진화와 분자생물학의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도전들이 일어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의 확장이 일어날 수도 있고 폐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과정이 전개될 것인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좋은 질문을 가지고 추구할 때 좋은 해답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벽한 것으로 보이던 뉴턴의 고전 역학에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는 아인슈타인에 의한 특수 상대성 이론이었다. 원래 고전 역학에는 보편적 상수가 없다. 특수 상대성이론으로 발견된 최초의 보편적 상수인 빛의 속도는 또한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한계치이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어떤 관측자도 진공에서의 빛의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신호를 전파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균열은 양자 역학의 등장이다. 1900년에 흑체 복사에 관한 연구를 하던 플랑크(Max Planck, 1858~1947)에 의해 폭탄처럼 던져진 量子(quantum)의 개념은 뉴턴의 고전 역학의 아성을 뿌리부터 흔들어놓았다. 고전 역학적인 에너지는 연속적으로 어떤 값이든지 갖는 것으로 이해됐으나 양자 역학에서는 에너지가 오직 불연속적인 값만을 갖게 된다.

또한 양자 역학에는 보편적 상수인 플랑크 상수가 등장한다. 플랑크 상수의 유한한 값은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파괴해버렸다. 두 가지의 물리적 양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해 확률론적인 세계관이 등장하게 된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가 얻어진 후 일정 시간이 흐르면 다시금 불안정해지고, 또 다시 나타나는 분기점에서 새로운 혼돈 상태로의 진화가 이뤄진다. 자연 현상이 혼돈에서 질서로, 다시 질서에서 혼돈으로의 진화가 이뤄지듯이 인류의 역사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는 복잡성의 과학을 탄생시켰다.

역사학, 정치학, 행정학, 경제학, 의학, 예술, 종교 등 실로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는 많은
현상들이 혼돈과 질서의 복잡성에서 비롯한다. 이들의 진행 과정과 발생 원 인을 잘 파악함으로써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프리고진은 1983년 미국 종교학술원 연차 총회의 ‘종교와 새로운 물리적 과학: 열역학, 진화, 그리고 神’을 주제로 하는 심포지엄에서 행한 강연에서 시간의 재발견이 우리가 관측하는 우주의 모든 수준에서 마주치는 변화의 메커니즘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태어난 우주에 보다 나은 인류의 동상사상을 이룩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도록 했다고 말했다.

레이저와 에딩턴이 이야기 했던 시간의 화살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팽창하는 우주에서는 정보의 보존이 불가능하며 또한 푸앵카레식의 회귀도 불가능해진다. 비가역적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고유한 비가역성을 포함하는 미시적 이론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타계한 프리고진의 꿈인 베르그송의 ‘지속’을 내포한 ‘시간의 화살’이 누군가에 의해 언젠가는 이뤄질 것을 기대해본다. 즉, 제2의 모세인 뉴턴과 세기의 천재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능가해 비가역적인 미시적인 세계와 거시적인 세계를 연결하는 혁명적인 새로운 종합이 사변적인 철학에 의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시도 끝에 결국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뤄지길 바란다.

 

 

의 속도를 처음 재려고 한 사람은 그전에도 있었겠지만, 갈릴레이가 등불 두 개를 사용해서 시도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이 실험에서 갈릴레오는 빛의 속도가 소리의 속도보다 10배 이상 빠르다는 결론까지는 도달했다고 한다. 후자가 약 초속 340m이니 이해할 만한 결과이다. 이 이야기의 가장 놀라운 대목은 빛에도 유한한 속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자체가 아닐까 한다.

17세기와 18세기 초에 걸쳐서, 천문학적인 관측을 통해 간접적으로 빛의 속도를 유추한 경우가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광속 측정 실험을 고안한 것은 19세기의 피조(Hippolyte Fizeau)라고 한다. 톱니바퀴와 거울을 사용한, 지금 보면 상당히 원시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1849년경의 실험의 결과가 초속 31만3천㎞, 이를 조금 다르게 구현한 푸코(L. Foucault)의 실험을 통해 나온 1862년의 결과가 초속 29만8천㎞이었는데, 지금 알려져 있는 그것과 비교해봐도 많이 다르지 않다. 당시의 제한적인 조건에서도 이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실험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위에서 줄곧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라고 이야기했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는 2억9천979만2천458m인데, 특이하게도 소수점 이하가 없다. 무언가의 개수도 아닌 바에야 조금 이상해 보인다. 속도는 진행한 거리를 걸린 시간으로 나눈 것이고, 이런 나눗셈이 정수로 떨어질 것을 기대하기는 힘든 데도 말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길이의 정의 자체에 빛의 속도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이른바 ‘메트르 데 자르시브(M?tre des Archives)’라고 부르는 백금 혹은 백금-이리디움 합금으로 만든 막대를 1미터라는 길이의 표준으로 사용했는데, 1983년에는 무언가의 길이를 사용하는 이런 체계를 포기하고, 대신 빛이 2억9천979만2천458분의 1초 동안 움직이는 거리를 1미터로 정의하기로 했다. 그래서 소수점 이하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이 이야기에서 빛의 속도가 절대적이라는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물리학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맥스웰로부터 시작된 빛의 이야기를 물리학자로서의 관점에서 되돌아봤다. 아인슈타인이 시간의 의미를 바꿀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고, 137억 년 전 우주의 시작을 지금의 인류가 직접 촬영하는 게 가능함을 알려주었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PC를 동작하게 해준, 그 모든 것이 맥스웰이 얹은 ‘숟가락’ 하나에서 시작됐다는 놀라운 사실에, 같은 물리학자로서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작 맥스웰 본인은 이러한 미래를 전혀 보지 못하고, 그의 이론을 집대성한 저서인 A 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의 교정판을 만들던 도중인 1879년에, 48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맥스웰 전자기 이론의 가장 직접적인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론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벌써 한 세기가 지나서, 이제는 그의 고전적인 상대성 이론이 완벽히 검증됐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가들에게 양자적인 의미에서의 중력은 아직 이해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다.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을 갈릴레이와 뉴턴의 덫에서 구해낸 1905년 아인슈타인의 기적을, 초끈 이론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얼마나 충실히 그리고 얼마나 구체적으로 재현해낼지 기대된다.

 

 

대 물리학에는 볼츠만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20세기와 함께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이론물리학은 볼츠만의 원자론과 확률론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물리 현상에 대한 정교한 수학적 분석보다 직관적 통찰력을 통해 찾아낸 추상적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볼츠만의 실용주의는 빈 출신의 20세기 철학자들에게도 매력적이었다. 과학 이론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더욱 철저한 시험 과정을 통해 신뢰를 얻으면서 더욱 좋은 이론으로 발전한다는 칼 포퍼의 주장은 이론을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았던 볼츠만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어와 定議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볼츠만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역학과 통계 열역학은 논리적 완성도가 유난히 높기 때문에 매력적인 이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하게 정의된 한정된 영역에서만 성립하는 제한적 과학 이론일 수밖에 없는 열역학과 통계 열역학에 대한 무분별한 확대 해석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열역학은 우주의 암울한 종말을 예언하지도 않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과학 이론이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의 유용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는 있지만, 과학 이론에서 인간의 윤리·도덕적 성찰을 찾으려는 노력은 무망한 시도일 수밖에 없다.
 
볼츠만은 현대 과학이 태동하고 있던 19세기 후반의 격동기를 오로지 자신의 물리학에 대한 천재적 통찰력과 수학적 재능만으로 견뎌내면서 원자의 존재와 물리 현상에 대한 통계적 해석을 현대 물리학의 기본 골격으로 만들어놓은 인물이었다. 오늘날 원자의 존재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과학적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 현대의 물리학이 원자보다 훨씬 더 작은 쿼크(quark)와 보손(boson)을 비롯한 기본 입자들의 존재를 넘어 ‘끈(string)’과 ‘막(membrane)’, 그리고 ‘암흑 물질(dark matter)’과 ‘암흑 에너지(dark energy)’의 존재까지 주장할 수 있게 된 것도 볼츠만의 덕분이다.

볼츠만이 과감하게 도입했던 확률과 통계에 대한 거부감도 완전히 사라졌다.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은 근원적으로 미시 세계에 대한 통계적 해석에 기반을 둔 것이다. ‘광자(photon)’의 개념을 주장해서 양자역학의 정립에 가장 핵심적인 기여를 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역설적으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우겼지만 자연의 물리학적 현상에 통계적 특성이 담겨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과학적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부분의 경우 양자역학은 실질적인 목적으로 볼 때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관찰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이다. 관찰과 같은 개념은 근본적인 이론의 구성에서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 보어의 양자역학 해석에 대응해서 아인슈타인이 대응하는 논리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씨름하는 과정에서 현대 물질문명이 태어났다. 뉴턴의 사고방식이 17세기 이후 자연과학뿐 아니라 사회의 인식 틀을 바꾼 것처럼, 양자역학의 사고방식은 20세기 이후 물질문명의 틀을 바꿔놓고 있다. 그리고 나날이 발달하는 양자역학 기술은 이제 양자공학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반도체와 집적회로, 신물질의 대량 생산, 초전도체의 이용, 양자 컴퓨터와 양자 신호 전달의 가능성 등으로 표현되는 21세기는 20세기와는 한 차원 다른 물질문명이 도래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양자 이론은 전통적으로 다루던 언어와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많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양자 이론은 이미 고도의 과학 발전과 혁명적인 현대의 물질문명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양면의 입장을 보는 과학자의 시각은 다음과 같은 겔만의 생각에 압축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양자역학의 신비하고 혼란스러운 분야는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사용할지를 알고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양자역학은 물리적 실재를 제대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과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전혀 직관적이지 않은 분야’다. 양자역학은 이론이라고 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이론이라면 꼭 들어맞아야만 하는 일종의 기본 틀이다.” 뉴턴은 만유인력을 설명하면서 “나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Hypotheses non fingo)”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원자 세계에서는 뉴턴처럼 자신 있는 명제를 실현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양자론에서 나오는 역설은, 어찌 보면 파인만의 얘기대로, “그 ‘패러독스’는 물질의 실재와 물질의 실재로 여기는 자신의 감정 사이의 갈등일 뿐”일지도 모른다. 보어는 양자론에 대해 “혼란스럽게 느끼지 않으면 당신은 양자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평했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아직도 중력을 포용하고 있지 못하다. 블랙홀과 우주 초기라는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모브의 우주와 이휘소의 입자물리학은 별개의 것처럼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휘소의 마지막 논문은 우주와 입자가 만나는 입자천체물리학의 효시가 되는 논문이다. 이에 대한 소개가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 이휘소 박사가 서거한 지 1개월 조금 지난 후 출판된 「무거운 중성미자 질량의 우주론적 최소치」라는 논문은 와인버그와의 유일한 공동 논문이었다. 이휘소 박사의 세 번째 ‘불후의 명작’이다. 표준모형에 나오는 여러 약작용하는 입자들 중에서 그 질량값을 이론적으로 조정해볼 수 있는 유일한 입자가 중성미자다. 그런데 중성미자의 질량값이 너무 크게 되면 뉴트리노만으로도 우주의 임계 질량을 넘어버리게 되어 중성미자 질량의 최대치를 추정할 수 있게 된다. 이휘소와 와인버그는 새로운 약한 상호작용을 하는 새로운 무거운 중성미자의 질량의 한계를 계산했다. 이 결과는 최근까지도 많이 연구되고 있는 암흑 물질 중 이런 새로운 약한 상호작용을 하는 것들에도 활용되고 있다. 사실 1980년대 초반부터 입자천체물리와 인플레이션에 기반을 둔 초기 우주론이 각광을 받게 되는데 이 모든 연구의 기초가 바로 이 논문이다. 또한 초대칭성 입자 등의 성질 연구에도 많이 쓰이는 업적이기도 하다.
 
가모브와 같은 창의적 물리학자들의 상상력과 집요하게 근본적인 질문들,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원소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질문들을 추구하던 물리학자들에 의해 빅뱅 우주론은 시작했다. 이제는 우주배경복사의 미세한 온도 차(10만 분의 1)를 재고 이를 통해 더 초기의 우주의 상태를 연구하는 집단 연구가 많아졌다. 부정확하던 우주론 연구가 정밀과학, 빅-테이터 과학이 된 것이다. 우주 시작 당시를 지배할 새로운 물리 법칙, 예를 들어 끈 이론 등을 찾으며 이를 통한 새로운 우주를 상상하고 있다. 다중 우주, 고차원 우주, 빅뱅 이전의 우주 등 인간 사고의 영역이 훨씬 더 넓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우주의 구성원인 암흑 에너지의 정체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전파 망원경을 넘어서 중성미자 망원경, 그리고 이제는 중력파 관측소를 통한 우주의 관측 가능 경계가 훨씬 넓어졌다.

이휘소가 지대하게 기여한 입자물리 표준모형은 2012년 힉스 입자의 발견으로 완결지어졌지만 이론적으로는 아직도 불완전한 이론이다. 이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1980년대 이후에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초대칭성, 암흑 물질 등 표준모형을 뛰어넘은 이론과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실험적 증거에 대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수천 명이 참여하는 대형 실험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국제 공동 연구 등을 통해 보다 활발해졌다. 그리고 먼 우주에서 오는 초고에너지 우주선을 통해 이제는 입자물리학과 천체물리학이 융합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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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2017-09-08 16:28:50
인간의 장기가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면 원래 주인의 생명과 상관없이 생명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의 주체에 의해서 통제되는 단일생명체인가 아니면 여러 생명체가 함께 살고 있는 집단생명체인가? 기존의 과학과 종교이론을 180도 뒤집는 이론으로 우주와 생명을 새롭게 설명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과학자와 종교학자들이 반론을 못한다. 이 책은 서양과학으로 동양철학을 증명하고 동양철학으로 서양과학을 완성한 통일장이론서다.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 현재가 존재한다. 그런데 현재라는 시간에 최소한의 기간이 있다면 현재 속에는 다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므로 현재라는 시간은 기간이 제로인 시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기간이 제로라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며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거와 미래도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을 기존의 물리학 이론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시간도 양자로 되어있으며 불연속이라고 설명할 건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양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자가 다른 양자로 변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시간도 하나의 존재라면 양자로 구성돼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이 불연속이라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실존할 수 없으며 시간이 없다면 역으로 양자의 변화도 불가능한 것이다. 우주의 모든 변화는 양자의 변화가 아니라 위치이동에 불과하고 그것을 과학자들은 시간의 흐름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양자가 변하지 못하면 창조도 불가능하다.

숫자는 연속적이고 양자로 구성된 자연은 불연속적이다. 그래서 자연은 수학적으로 작동하지 않지만 자연의 작동을 수학적으로 추정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수학으로 추정한 값은 모두 근사치며 참값이 아니므로 거시와 미시 영역에서는 전혀 엉뚱한 값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수학은 양(결과)을 계산하는 데는 유용한 도구지만 성질(원인)을 계산하는 데는 무용지물인데 과학자들이 모든 물리학이론을 수학으로 증명하려고 하므로 여러 가지 오류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