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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리학을 넘어 다학제간 통합적 연구로 …
국가 차원 긴 호흡으로 접근하자
정신병리학을 넘어 다학제간 통합적 연구로 …
국가 차원 긴 호흡으로 접근하자
  • 김명희 건국대 HK연구교수·사회학
  • 승인 2017.09.0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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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_ 통합적 자살연구를 제안한다

사회 곳곳에서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송파모녀 자살처럼 가족들의 극단적인 선택도 잇따르고 있다.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서 자살이 미치는 영향은 자못 심대하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자살에 관한 연구, 자살의 원인에 관한 학제적 연구는 그리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 한국자살예방협회가 개최한 ‘자살예방종합학술대회’는 시의적절한 논의를 마련한 자리였다. 특히 김명희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사회학)가 「사회학적 관점과 다학제간 통합적 자살연구의 가능성」(PPT)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정신병리학적·심리학적 자살정책’에서 탈피해, 통합적 정책으로 나아가길 주문했다. 그의 문제의식을 들어본다.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1일까지 이틀 동안 ‘여전한 의문, 한국인의 자살’을 주제로 열린 제12회 자살예방종합학술대회의 마지막 세션에서 필자는 자살의 ‘사회학적 관점’이란 무엇인지 발표를 요청받았다. 쉽게 또 혼자 답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일단 자살이라는 현상의 ‘원인(causes)’을 다시 묻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반갑고 뜻 깊은 일이다. 오랫동안 자살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자살의 원인은 우울증’ 혹은 ‘자살은 정신질환의 결과’라고 하는 정신의학적 프레임이 불문의 상식으로 자리 잡았던 까닭에, 원인을 묻고 따지는 절차가 실종된 채 예방적 개입이 이뤄져왔다. 자살의 원인을 다시 묻는 작업엔 의료적 접근의 지평을 넘어, 문제 해결을 위한 다학제간 통합적 자살연구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있다고 이해했다.

물론 2003년 이후 OECD 국가 1위를 점하고 있는 한국사회 자살률이 우리사회의 구조적 병리를 드러내는 지표이며, 복합적 원인들이 작용한 결과라는 합의가―적어도 담론 수준에서―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라는 인식하에 국가수준 자살예방정책의 기조 또한 개인·정신의료 중심에서 전사회적·범부처적·지역사회기반·민관협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해왔다. 근거기반 원인추적과 중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널리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여전히 모호하며, 응용(개입)과 실행 수준에서 자살예방정책은 정신의학 프레임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딜레마를 직시하기 위해 국가수준 자살예방전략을 담고 있는 텍스트를 토론의 출발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사회 없는 자살예방을 넘어서?

2011년 3월 30일 제정된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은 5년마다 국가 자살예방계획을 수립하도록 규정(제7조)하고 있다. 제2차 자살예방기본계획(2009~2013)이 종료된 후 한참을 공백상태로 있던 제3차 자살예방기본계획이 ‘생명사랑플랜’(2016~2020)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엄밀히 말해 이는 제3차 정신건강종합대책의 4대 과제중 하나로 들어가 있는 자살예방계획을 지자체계획안 수립을 위해 풀어쓰면서 ‘생명사랑플랜’이라 명칭을 붙인 것이다. 그럼에도 ‘생명사랑플랜’은 제1·2차 자살예방계획이 1) 지나치게 보건의료·정신과적 위기개입 모델에 치중돼 있기에 사회경제적 위험요인을 해소할 사회적 지지체계가 미흡하며 2) 자살 고위험군 뿐 아니라 수요자 중심―학교 밖 청소년, 노인, 자살 유가족, 중년 남성, 군인, 빈곤계층 등―의 맞춤형 자살예방대책과 3) 정신건강증진센터(현 정신건강복지센터로 명칭변경)만이 아닌 생활터전 기반 자살예방서비스가 필요하다는 나름의 평가를 담고 있다.
 
제2차 자살예방기본계획과 비교할 때, ‘사회적 지지체계 마련’과 ‘지역사회 자살대응 역량 강화’를 10대 과제 중 일부로 명시했다는 점도 유의할만하다. 문제는 이 과제를 수행할 전달체계가 정신건강증진센터로 구축된다는 점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성과지표 중심의 이행관리 수준에서 전략과 개입(실행) 사이에 심각한 불일치가 발생한다는 데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1) 인식개선을 위한 국민참여형 캠페인 2) 언론의 자살보도 권고기준 준수율 향상 3) 자살에 치명적인 수단에 대한 접근성 감소(농약, 번개탄 등) 4) 자살 고위험군에 대한 정신보건서비스 강화·게이트키퍼 육성 등이 양화된 실적 평가체계에 의해 추동된다. 이를 대증요법적 개입이라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이 프로그램들이―뒤르케임이 말하듯―자살의 사회적 조건과 遠因을 통제하기보다, 자살과 정신질환 사이의 상관관계 혹은 近因을 통제하는 미봉적 개입에 머무는 까닭이다.

'또 다른 형태의 비정상적 분업'과 자살의 의료화

이는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동하는 오류를 수반하는데, ‘2016 정신건강종합대책’도 “정신건강 및 음주 문제가 자살의 가장 큰 원인”(5쪽)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의학적 모델에 정향된다. 하지만 같은 세션의 이원영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의학적 모델은 자살의 정신병리(psychopathology)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정신질환은 단지 기여요인들 중 하나일 뿐이다. 결국 지역사회 대응역량을 강화한다는 ‘생명사랑플랜’의 정책기조는 정신건강증진센터의 실행체계를 중심으로 짜여진 ‘지역사회 정신건강연계체계(안)’(45쪽)로 수렴되고 만다. 

실제 2016년부터 자살예방 프레임을 의료모델에서 사회통합모델로 개혁하고자 독립 출범한 ‘서울시 자살예방센터’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25개 자치구의 관련 실무자들은 현재 이원화된 보건소와 정신건강증진센터 중심의 자살예방체계 사이에서 수많은 부작용과 현실적 과부하를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서울시 지역사회기반 자살예방사업의 현재」, 2016). 이 같은 조건에서 지역 실정과 사례에 근거한 사회적 지지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요원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를 뒤르케임(1893)이 말한 ‘또 다른 형태의 비정상적 분업’에 비견해볼 수 있겠다. 이는 행위자들이 특정한 행동조직 내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그들의 활동은 체계적이지 못하고 여러 기능은 잘 조율되지 않으며, 조직 내의 활동은 전체적 일관성 없이 이루어”지는 무질서 상태를 말한다.

보다 통합적인 자살연구 향해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보건소 중심이든, 정신건강증진센터 중심이든 일단 의료화된 자살예방정책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원인을 은폐하고 의학적 개입의 신뢰도와 타당도에 대해서만 논의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의학이라는 제도 밖에 있는 자살의 사회적 원인은 정책적 의제로 설정되지 못하기에, 의료화는 문제정의 방식에서부터 현상을 왜곡하게 된다. 이를테면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연쇄자살은 정리해고와 실업, 사회적 배제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자리하며, 탈북자 자살의 배후에는 사회적 편견과 낙인이라는 사회문화적 조건이 함께 작동한다는 점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자살문제를 전문가가 치료해야할 ‘개인의’ 정신건강 문제이자 의료적 문제들로 다룰 때, 자살문제 해결을 위한 민간/시민 참여의 동력을 확보하기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너무나 위험하게도 사회문제로서 자살문제를 다룰 담론 공간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자살이 관계(연대)의 문제이자 사회안전의 문제이며, 사회권·생명권과 같은 인권의 문제라는 목소리는 들어설 여지가 없다. 자살의 사회구조적 맥락을 복원하고 국가-사회 차원의 책임을 마주할 대안적인 어젠다 셋팅과 독립적인 자살예방체계 구축이 절실하다.

한편 작금의 현실은 자살문제 해결을 위해 보다 통합된 설명을 제시하기 위한 학제간 노력이 부족했던 과정에도 책임이 있다. 원론 수준의 이야기를 넘어 구체적 연구에 기반한 근거종합이 요청되는 이유다. 정책 형성이 진흙탕을 벗어나려면 건전한 근거가 필요하다.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근거를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합성하는 연구방법론은 근거중심 학문의 핵심이다. 최근 보건의료 분야에서도 적용?확장되고 있는 실재론적(critical realistic) 근거종합은 판단이나 효과성에 초점을 두기보다 설명(explanation)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을 요한다.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사례연구에 기반한 다학제간 연구체계 구축해야

자살의 사회학적 관점이 공명하는 맥락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사회학은 하나의 분과학문을 뜻하지 않는다. 뒤르케임의 자살론이 개척한 사회학적 관점은 자살을 야기하는 사회적 힘(원인과 조건)을 해명하며, 다수준의 원인들―생물·심리·사회적(관계적) 층위의 인과기제―을 인정하는 기초존재론의 수준에 정초된다. 자살을 야기하는 위험요인과 이를 상쇄할 보호요인도 해당 사회의 도덕구조(연대)라고 하는 관계적 실재의 수준에 자리한다. 물론 사회의 건강과 개인의 건강이 긴밀히 얽혀있듯, 실제 사회적(관계적) 층위의 속성이 개인의 심리적·생물학적 속성에 이르는 인과관계의 고리는 매우 길고 복잡할 것이다(그 역도 가능하다). 이 같은 다수준의 복합적 결정을 고려할 때―여러 변수의 평면적 결합이 아닌―환원주의에서 벗어나 각 층위의 연계적 접근과 통합적 개입을 아울러 고려할 수 있다. 그리고 다수준 힘의 복합적 결정관계는 실제 사례와 로컬 수준에서 구체성과 통합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다양한 사례연구에 기반한 입체적인 자살 원인 추적연구가 필요한 까닭이다.
 
이러한 다학제간 연구에 따라 자살의 보호요인도 관계적 실재의 수준에서 찾아내고, 사회정책·지역복지·보건의료 부문이 협력할 수 있는 사회통합모델을 모색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지역 차원에서 사회복지 안전망을 구축하고 연대와 소통 공간을 촉진하는 것이 보다 장기적 효력을 갖는 자살의 대항력이 될 수 있다. 특히 지역은 삶의 터전이 되는 곳이기 때문에 지역의 특수한 사회적 변동을 파악하고 지역특성을 고려한 자살의 실태 분석이 정책수행에 선행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와 실험은 ‘보여주기식’ 성과평가체계 안에선 시도되긴 어렵다. 단기적인 평가사정에 의존하는 체계에서 벗어나,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는’ 긴 호흡으로 우리 시대의 죽음에 책임을 질 보다 설명적이고 통합적인 개입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김명희 건국대 HK연구교수·사회학

외상과 자살을 窓으로 한국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트라우마로 읽는 대한민국』,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등을 함께 썼으며, 『통합적 인간과학의 가능성: 맑스와 뒤르케임의 실재론적 귀환』을 상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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