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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 교체기, 난세 속 지식인들의 삶과 생존방식
명·청 교체기, 난세 속 지식인들의 삶과 생존방식
  • 홍상훈 인제대 국제어문학부·중문학
  • 승인 2017.09.0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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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증오의 시대』·『생존의 시대』 자오위안 지음 |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663쪽 32,000원·758쪽 38,000원

辛亥革命(1911.10.10)을 정점으로 하는 청 왕조의 붕괴 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건 가운데 하나로 만주족 청 왕조에 대한 반대 운동을 꼽을 수 있다. 이 운동에는 황제의 전제정치를 보장하는 봉건왕조를 타파하려는 요구 위에 그 동안 이민족으로서 한족을 지배해 온 만주족에 대한 반발심리가 미묘하게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생겨난 민족차별의식은 청 왕조가 완전히 청산된 뒤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학술과 문화 예술, 철학 등 여러 분야에 잠복하여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필자가 기억하기로 문학의 경우는 1998년 아라(阿來)의 『먼지가 가라앉다(塵埃落定)』와 2004년 쟝롱(姜戎, 본명 呂嘉民)의 『늑대 토템(狼圖騰)』 같은 장편소설들이 인기를 끌면서 비로소 만주족을 포함한 소수민족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과 멸시가 어느 정도 완화되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리고 문학 이외의 학술 분야에서는 대략 1990년을 전후로 시작된 ‘새로운 淸史’ 운동을 주목할 만하다.

‘새로운 청사’ 운동의 핵심은 청 왕조의 특수성을 간과한 채 단순히 그것을 명 왕조에 대한 실패한 재현과 모방으로 귀결시키면서 한족에 대한 탄압에 나타난 만주족의 문화적 未開性을 강조하던 기존 ‘漢化論’의 오류를 바로잡자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특히 명 왕조와 달리 이민족 신분으로 여러 민족이 공존하는 광대한 왕조 판도를 통치한 청 왕조의 구조적 특수성에 주목하고, 이것을 서양식의 제국주의와 연결시키면서 상대적인 우수성을 강조하는 편향적인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극단적 주장들은 지속적인 연구와 논의를 통해 공정한 중심을 찾아가고 있는 상황이며 연구 분야도 왕실과 조정, 상층 사대부-관료에서 중하층 지식인들과 기층의 일반 백성들에까지 갈수록 그 범위가 확대되고 사유의 깊이도 심화되는 추세다.

이런 저작들 가운데 2010년에 양녠췬(楊念群)이 발표한 『강남은 어디인가(何處是江南)』는 청 왕조가 어떻게 ‘정통성’의 지위를 확보했는가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황제의 정책과 지식인들의 지향 사이의 긴장과 공감을 박진감 있게 서술한 것으로 국내에도 번역돼 있다(박계화 등 공역, 글항아리, 2015). 그리고 이번에 필자가 번역한 자오위안(趙園)의 『명·청 교체기 사대부 연구(明淸之際士大夫硏究)』(北京大學出版社, 1999)는 이미 2006년에 3쇄를 찍을 만큼 이 분야 연구에서는 필독서로 자리를 굳힌 역작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이제야 한국에서 번역돼 나왔다.

1999년 출간, 2006년에 3쇄 돌파한 ‘필독서’

번역서의 제목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의 제1부 『증오의 시대』는 명 왕조의 쇠퇴와 멸망으로 급작스럽게 생존의 기반을 잃어버린 사대부들이 ‘지독한 미움’을 품은 채 자학하고 주변을 학대하는 갖가지 행태와 심리를 분석하고 서술한다. ‘君父’인 왕조와 황제를 상실하고도 순절하지 못한 채 살아남은 혹은 ‘남겨진’ 이들은 이민족의 통치 아래 목숨을 유지해야 할 나름의 이유에 대해 논리적인 변명을 마련해야 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의 심층을 들여다봄과 동시에 왕조 교체기에 일어난 여러 가지 문화 현상 즉 남과 북으로 대표되는 정치와 문화의 대립과 난세 속에서 宗法을 재건하고자 하는 世族들의 노력, ‘사회적 지위[品流]’에 대한 다양한 탐색, 그리고 건문제와 영락제 사이의 정치적 변동이 이른바 ‘정통성’과 관련해 갖는 의미, 그리고 ‘淸議’와 言官으로 대표되는 사대부들의 言路에 이르기까지 당시 ‘유민’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 사회를 최대한 입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했다.
제2부 『생존의 시대』는 유민의 생존 방식과 학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벼슬살이라는 유일한 생계의 끈이 끊어진 상황에서 그들은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잇속에 밝다(『論語』 「里仁」: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는 유가의 교조적 원칙을 무릅쓴 채 ‘목구멍에 풀칠’할 방도를 찾아야 했고, 청 왕조의 탄압을 피해 불교나 도교로 도피하기도 했다. 또한 청 왕조의 벼슬아치가 아닌 상태일지라도 백성을 보살피고 교화한다는 전통적인 사대부의 의무를 수행할 방법을 마련해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나아가 학술을 통해 명 왕조의 멸망 원인을 찾고 經學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시대와 자손의 시대가 교차하는 시공의 비통한 변화 속에서 윤리적 곤경을 절감해야 했던 그들의 삶이 저자의 거침없는 서술 속에서 때로는 비극처럼, 때로는 희극처럼 펼쳐진다.

꼼꼼한 譯註로 옮겨낸 명·청 교체기 풍경

이 책은 원작이 463쪽(중국식으로 말하자면 글자 수가 약 46만5천 자)으로서 그다지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내용 자체가 거의 1차 자료의 인용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읽기도 번역하기도 모두 쉽지 않다. 게다가 중국 학술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인용한 고문에 대한 자세한 주석이나 현대어 해석을 첨부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은 더욱 가중된다. 이 때문에 필자는 인용문을 따로 떼어 읽기 편하도록 편집하고, 필자의 역량이 닿는 범위에서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주들을 최대한 상세히 붙이려고 노력했다. 이 바람에 저자의 원주에 대한 번역은 국한문혼용으로 분량을 최소화했음에도 번역서의 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결국 출판사의 의견에 따라 원서의 제1부와 제2부를 나누어 각기 『증오의 시대』(663쪽)와 『생존의 시대』(758쪽)라는 별도의 제목으로 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명·청 교체기의 주요 사대부들이 남긴 문집과 전집을 중심으로 한 130종 가까운 1차 자료와 30여 종의 연구 저작들을 참조했다. 1차 자료들은 대부분 『船山全書』와 같이 그 자체로 규모가 방대한 것들인데,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저자는 詩와 詞 등의 문학 작품은 거의 배제하고, 史論을 제외한 經學論이나 철학론은 인용을 최소화했으며, 대부분 書簡과 題跋, 碑銘, 行狀 등의 자료를 인용해 독자의 두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 했다. 물론 이런 인용들도 극소수의 인명에 대한 보충설명을 제외하면 주석이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에, 사실 역자의 현재 역량으로는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은 전문지식을 가진 독자들의 친절한 도움으로 차츰 바로잡아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어쨌든 저자가 이런 자료들을 선택한 것은 중국 현·당대 문학을 연구하다가 미술과 영화에 대한 탐구를 거쳐서 1980년대 말엽부터 명·청 시대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연구로 관심을 돌린 특이한 경력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명·청 교체기 遺民과 지식인들에 대한 냉철하고 객관적인 분석보다는 문학적 감수성이 느껴지는 심리 분석이 자주 발견되고, 학술서답지 않게 반어적이고 때로는 은유적인 문체를 느낄 수도 있다. 또한 이 책에서 다루는 ‘사대부’들이 대부분 명말·청초의 정치 환경에서 벼슬살이와 인연이 미약하거나 아예 없었던 이들이기 때문에 이른바 ‘제도권’ 외부의 기층에서 형성된 풍경을 심도 깊게 감상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양녠췬의 『강남은 어디인가』와 상호 보완을 이루는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명·청 교체기 다양한 지식인들의 언행과 사상을 통해 시대와 정치적 격랑 속에서 지식인이 취해야 할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일독의 가치가 있다.

 

홍상훈 인제대 국제어문학부·중문학
서울대 중어중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그래서 그들은 서천으로 갔다: 서유기 다시 읽기』, 『한시 읽기의 즐거움』(문화관광부 추천도서) 등이 있으며,  주요 역서로는 『서유기』(공역), 『중국소설비평사략』, 『완역 두보율시』(공역), 『시귀의 노래: 완역 이하 시집』(문화관광부 추천도서), 『양주화방록』(공역,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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