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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 『수학의 철학』(힐러리 퍼트남 외 엮음 / 박세희 옮김, 아카넷 刊)
깊이읽기 : 『수학의 철학』(힐러리 퍼트남 외 엮음 / 박세희 옮김, 아카넷 刊)
  • 박정일 / 세종대 초빙교수·철학
  • 승인 2002.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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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퍼트남(H. Putnam)과 베나세라프(p.Benacerraf)가 편집한 ‘수학의 철학’은 20세기 수학철학의 주요한 흐름에 비춰 가장 중요한 논문들을 선별·수록한 논문모음(anthology)이다. 이 책은 수학철학에 관한 한, 이미 고전으로 정평이 나 있다. 수학철학 연구가 열악한 상황에서, 이 책의 번역 출간은 한국 학계에는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20세기 수학철학의 역사는 가히 격동기였다. 특히 1900년에 개최된 수학자 대회는 그런 격동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수학자들은 이 대회에서 자신들의 업적에 고무돼 축배를 들고 있었지만, 밖에는 엄청난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19세기말 칸토르에 의해 집합론이 창안되자 수학은 탄탄한 기초를 지니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집합론에서 러셀의 역설 등이 발견됨에 따라 수학은 그 존립마저 위태로운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기존의 수학철학과는 다른 세련된 형태의 세 학파, 즉 논리주의, 직관주의 그리고 형식주의가 등장하고 서로 각축을 벌이며 바야흐로 삼국시대로 접어들게 됐다.

1부는 이런 세 학파가 주도한 심포지엄에서 시작하고 있다. 논리주의, 직관주의 그리고 형식주의 철학자들은 각각 자신의 입장을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진영을 대표하는 카르납, 하이팅, 폰 노이만의 논문 다음에 나오는 하이팅의 짧은 대화편은 그들의 입장 차이를 명쾌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다음 이 진영의 창시자들인 프레게와 러셀, 브라우워, 그리고 힐베르트의 논문들이 소개된다.

그러나 그들의 논쟁은 1931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발표되자 주춤거린다. 형식주의가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삼국의 각축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괴델의 실재론이 유포되기 시작한다. 수와 같은 수학적 대상이 이데아라는 2천년 전 플라톤의 실재론이 20세기에 이르러 괴델을 통해 다른 모습으로 부활한 것이다. 그만큼 괴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한편, 이 당시에 한 가지 중요한 현대적 시각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소위 규약주의이다. 규약주의에 따르면 ‘1 + 1 = 2’가 참인 이유는 우리가 ‘1’, ‘2’, ‘+’, ‘=’이라는 기호에 그러그러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2, 3부의 베나세라프의 논문은 괴델 식의 실재론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진 것이었다. 존재론적 측면과 인식론적 측면에서 이는 대단히 주효한 것이었으며, 그 여파로 실재론은 흔들리고 급기야는 이를 대체할 다양한 수학철학들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베나세라프가 포문을 열자 실재론의 성벽이 무너지면서 춘추전국시대로 돌입한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춘추전국시대로 나아가기 바로 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 중 헴펠의 논문은 규약주의의 견해를 잘 대변하고 있고, 콰인은 규약주의 일반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면서 그의 전체론을 내세운다.

4부에서는 집합의 개념이 다뤄지는데, 특히 축차적 집합관(the iterative conception of sets)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불로스의 논문은 이 주제를 매우 간명하고 쉽게 해설해 주고 있다. 또한 하오 왕은 괴델의 실재론에 공감하면서 축차적 집합관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엔솔로지의 논문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으레 편집자의 관점을 알 수 있다. 원래 이 책의 초판(1964)에는 비트겐슈타인과 관련된 논문들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재판(1983)을 내면서 편집자들은 그 논문들을 모두 제외시켜 버렸다. 당시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에 가해졌던 비판이 대단히 혹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모두 제외시킨 것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현재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은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고, 또 앞으로 그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가 난해하기로 소문난 것들이다. 아주 가끔 오역(예컨대, 53쪽 18줄, 508쪽 11줄)과 번역상의 어색한 표현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수학과 철학간의 교류가 대단히 빈약한 국내의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며, 큰 줄기에 견줘보면 극히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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