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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표현의 자유로 짚어보는 2002년 문화정치
[분석] 표현의 자유로 짚어보는 2002년 문화정치
  • 교수신문
  • 승인 2002.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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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길섶 / 문화평론가

표현의 자유라 함은 통상 영화나 소설 혹은 만화 등에서 창작자들에 해당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올해도 역시 그러한 사건이 발생했다. 주지하다시피 최근 개봉된 영화 ‘죽어도 좋아’가 ‘표현의 자유’ 도마 위에 오른 것. 애초 그 영화는 2002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고, 그때는 별로 주목되지 않았으나,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이해할 수 없는 등급 결정을 하는 바람에 이슈거리가 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등급결정이라는 게 다른 것이 아니라, 제한상영관도 없는데 제한상영관용으로 등급결정을 해버렸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그 영화를 보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심의였던 것이다. 문제는 일반 관객들이 봤을 때도 아무렇지도 않을 영화에 대해 과잉적으로 단속하여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켰다는 점에 있다. 영상물등급위는 그런 식의 표현 자체를 말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등급을 제한하자는 것이다, 라고 변명할지 모르나 등급분류 방식으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올해 영화 1천7백여편, 등급불가 및 등급보류 판정

달리 말하여 1997년 제정된 청소년보호법 이후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거나 제한하는 방식이 좀더 합리화됐다는 것이고, 그 덫에 걸린 게 ‘죽어도 좋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덫에 걸린 게 그 영화뿐만이 아니다. 기겁할 정도로 많다. ‘표현의 자유와 영상물등급위원회 개혁을 위한 포럼’에 따르면 무려 1천7백41편이, 2002년 한 해에 등급불가 및 등급보류 결정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이 안간다. 게다가 영상물등급위원장이 김수용 감독이고 그 자신은 올 부산영화제에서 회고전을 통해 군사정권 때 자신의 영화들이 난도질당한 것을 복권하려 했다니 얼마나 모순된 폭력인가.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예술활동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당장 우리는 대통령 선거철에 즈음하여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유린당하고 있다. 최근 대선과 관련해서 수천건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적발’되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 네티즌들은 자유롭게 인터넷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고 소통하고 있고. 그것은 정치적 민주주의 발전에 기본적인 요소이다. 참여 없이, 개인들의 자유로운 표현과 소통 없이 과연 정치문화의 성숙이 가능한 일인가. 물론 경찰이나 검찰은 선거법 위반을 문제삼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의견을 표현한 것조차 선거법 위반이라 하면 정치적 표현의 자유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되고 만다. 헌법재판소에서도 지난 6월 전기통신사업법과 관련해 인터넷이 기존 매체와는 달리 가장 참여적이며 표현촉진적인 매체라는 것을 분명히 했고 행정규제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리적 폭력이 가해지지 않는 한 어떠한 표현이라도 자유롭게 소통돼야 한다.

하지만 보수적이고 파시즘적인 지배집단에 의해서만 표현의 자유가 유린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홈페이지 게시판을 가보면 참으로 희한한 일을 목도할 수 있다. 누군가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글을 올린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게시판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최근 대의원대회에서 이회창 후보나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글은 게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어용이 아닌 이상 민주적 노동조합해서 그런 생각을 발상했다니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민주노총의 방침에 따라 아마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기로 해서 그런 모양인데, 그런 조급증이 표현의 자유를 유린하는 위험한 요소를 안고 있다. 조직적으로 특정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해서 노조 ‘자유게시판’에서 타 후보에 대한 지지표현조차 못하게 금지하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문화적 전환에 장애물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이런 일은 최근 진보적 정론지라고 자처하는 한겨레에서도 발생했다. 한겨레의 ‘왜냐면’ 꼭지를 편집해온 홍세화 씨는 한겨레 편집위원장으로부터 ‘충격적인’ 일을 당했다. 12월 10일자로 쓴 ‘한겨레는 민주당 야전사령부인가’라는 제목의 그의 글에 따르면, MBC ‘100분 토론’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지지자로 참석해 공개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왜냐면’ 편집권을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편집위원장의 전화 한 통화로. 이에 대해 홍세화 씨는 “한겨레에 힘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집단에 숨어 있는 구성원들의 편의적이며 이기적인 수구성을 확인한다”며 “한겨레에 진보를 용인하지 않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의혹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만일 홍세화 씨가 권영길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왜냐면’ 꼭지를 편집했다면 절차상의 문제를 빼고는 한겨레의 방침이 옳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런 혐의는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는 우리 안의,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공간 안에서조차 어이없게 벌어지고 있다.

표면 뒤 숨어있는 기득권 논리

2002년의 문화적 키워드를 표현의 자유라는 맥락에서 간단히 짚어보았다. 2002년. 보수집단에 의해서만 그것이 유린되는 게 아니라 진보진영에서도 유린되고 있는 표현의 자유는 우리의 현 위치를 파악하게 해준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 ‘침해’하면 으레 보수집단의 행위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러한 통념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진보의 진보를 억압하는 진보집단 내부에서의 표현의 자유 침해는 부분적으로 수구성이 깔려 있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권력화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은 보수집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표현의 자유를 유린하는 것은 표현 자체가 표면적 이유일망정 속내로는 권력적 기득권의 논리가 배어 있다. 요컨대 표현의 자유 문제는 인간의 표현본성의 자유로움 보장이라는 존재론적 사고 외에 권력적 헤게모니 내기에 걸린 문화정치적인 것임을 각인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면서도 2002년도에도 여전히 우리의 문화를 퇴행시키는 핵심적 작동원리였다는 점에서 또 한번 씁쓸한 한해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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