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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 해법 지원하는 독립기구 설립하자
사회문제 해법 지원하는 독립기구 설립하자
  • 박해남 한신대 강사·사회학
  • 승인 2017.07.1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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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_ 한국사회연구원이 필요하다

지난 겨울 많은 시민들이 전국의 광장을 빼곡히 메웠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첫 번째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격차, 3포와 5포를 넘어 N포라 불리기까지 포기해야 하는 젊은이들의 현실, 갑과 을로 나뉜 사회에서 겪게 되는 소외와 차별 역시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광장을 메운 이들에게 전 대통령 박근혜는 직무의 遺棄者를 넘어 이 사회에 편재한 불공정의 상징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새 정부가 사회적대타협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도, 박근혜 정부가 사회부총리직을 만든 것도, 문제의 심각함과 해결의 시급함에 대한 공감대가 충분함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이 문제들은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과 대중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왔고, 이로써 자신들의 삶을 조금씩이나마 진전시켜왔다. 하지만 그 진전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문제의 인식과 해결을 두고 씨름했던 사회과학 연구소들과 그곳의 지식인들이다. 19세기말~20세기 초 파리, 보스턴, 취리히, 바르셀로나에는 사회박물관(Mus?e social)이 만들어져 국경을 넘어 지식을 나누고 해당 사회가 가진 문제들과 씨름했다. 이 연구소의 영향력은 비엔나와 프랑크푸르트에까지 미쳤고, 사회조사연구소를 탄생시켰다. 아도르노, 하버마스, 호네트 등 20세기 사회과학을 뒤흔든 지식인들을 배출한 그곳 말이다. 이 기관들의 지식인들 중 다수는 복지국가라는 틀 속에서 노동하는 이들의 생의 조건을 진전시키는 데 기여해왔다. 그래서 복지국가 발전의 역사는 한 사회가 가진 과제의 인식과 해결에 있어 연구기관들과 그곳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연구기관의 중요성은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금세 드러난다. 지난 반세기, 정권이 ‘성장’과 ‘발전’에 매진하던 시절,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이를 뒷받침할 수많은 정책들을 생산해왔다. 심지어는 방향 수정에 대한 제안조차 이들로부터 나온 바 있다. 전국 곳곳에 세워진 다수의 연구소들 역시 (그 중 상당수는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가 및 지자체로부터 주어진 과제들과 성실하게 씨름해왔다. 그 철학에 대해서야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체제가 외부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주어진 과제들과 씨름할 지식생산의 장을 제공했다는 점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사회 내 불평등과 불안의 편재는 지난 세기의 성장과 발전만큼이나 우리 사회 전체가 씨름해야 할 문제가 됐다. 성장과 발전을 앞세워 온 과거의 한국을 넘어설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 지금, 지난 세기 한국개발연구원의 그것처럼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읽을 수 있는 연구기관이 존재한다 할 수 있을까? 한국개발연구원(KDI)을 포함한 다수의 경제연구소들이 경제부총리직을 지원하고 있다면, 한국사회연구원(KSI) 같은 것이 있어 사회부총리직을 지원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 것 없어도, 경제학이나 과학기술분야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란 한 두 개의 분과 연구소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청년들은 정규직 일자리에 목을 매며 ‘생존’ 같은 단어까지 활용하고 있다. 이것이 소득의 문제만 아니라 주거, 결혼, 출산, 나아가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사회 내에서 얻게 될 인정과도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동, 가족, 복지, 주거, 문화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이 같은 문제들을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하고 종합할 기관 없어도 해결 가능하다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들은 지난 수십 년간의 방식으로는 해결 불가능함이 드러났다. 온 사회가 동원돼 총량적 경제성장에 매달리고 그것으로 다수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방식 말이다. 이제는 우리 실정에 맞는 정의와 연대의 원칙을 세우는 가운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때다. 사실, 모든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이해를 대변할 조직체에 속하고 이들의 대표들이 모여 이루는 사회적 대타협에 기초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문제해결의 방식이긴 하다. 그러나 어쩌랴, 안타깝게도 우리 역사는 아직까지도 그러한 조직들을 다수의 시민들에게 허락하지 않고 있다. 모든 이들이 조직에 속하기를 기다리기엔 사안이 시급하다. 그렇다면 연구를 통해 문제의 표층과 심층을 읽어내고, 세워야 할 원칙을 탐구하고, 의견을 듣고, 대안을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한다. 그러기에 연구기관이, 그곳에서 일할 지식인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회연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해남 한신대 강사·사회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문화 영역에서 발견되는 한국의 근대성과 ‘사회적인 것’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한국현대 생활문화사』를 썼고, 『빈곤과 공화국: 사회적 연대의 탄생』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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