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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譯中人의 사회비판의식과 급진적 변혁사상이 사상적 기원”
“醫譯中人의 사회비판의식과 급진적 변혁사상이 사상적 기원”
  • 김종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외교학
  • 승인 2017.07.1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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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김종학 지음 | 일조각 | 456쪽 | 35,000원

1874년 3월 6일, 베이징주재 영국공사관 서기관 윌리엄 메이어스(William F. Mayers)는 뜻밖에 조선인 2명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연행사의 역관과 반당이었다. 역관은 자신을 ‘외부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으며, 또 외국 문물에 대해 뿌리 깊은 편견을 갖지 않는 극소수의 조선인 중 1명’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여기 온 사실을 절대 비밀로 해줄 것을 신신당부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문호개방 또한 불가피한 역사적 필연이다. 이를 거부하면 훗날 무고한 백성이 겪을 고통만 더 커질 뿐이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그 지위와 특권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서, 외국과의 접촉은 물론 서양문물과 국제정세에 관한 정보가 백성들에게 유입되는 것조차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변화는 오직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비밀리에 영국공사관을 찾아온 목적은 군함을 조선에 파견해서 그 은둔체제를 깨뜨려줄 것을 청원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진의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메이어스는, 외무성에 송부한 기록(memorandum)에서 이를 ‘기묘한 희망(a singular hope)’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개화당의 비조 중 1명으로 알려진 亦梅 吳慶錫(1831~1879)과 秋琴 姜瑋(1820~1884)였다.

이 책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는 필자의 동명 박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국내외 외교문서 및 미간문서에 기초해서 개화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비밀결사의 결성배경과 목적, 외국인과의 은밀한 교섭을 추적하고, 그 맥락에서 갑신정변의 원인과 진행과정을 다시 조명한다. 개화당 연구에서 일본과 서구열강의 외교문서는 매우 유용한 1차 사료다. 왜냐하면 개화당은 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외부의 힘에서 구했으므로 그 행적과 발언이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전공이 외교사임에도 불구하고 개화당 연구에 천착하게 된 계기도 여기에 있다. 

필자의 주장은 비교적 단순하다. 오경석의 일화에서 보듯이 개화당은 처음부터 외세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정권 장악과 조선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도모한 혁명비밀결사 또는 역모집단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신미양요(1871) 직후 오경석과 유홍기가 김옥균을 포섭하면서 처음 결성됐으며, 따라서 그 사상적 기원은 박규수를 매개로 한 조선후기 실학이 아니라 醫譯中人의 철저한 사회비판의식과 급진적 변혁사상에 있다고 주장한다. 

존 통설에 따르면, 처음에 박규수의 문하에서 개화파가 형성된 후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淸의 간섭과 조선의 자주독립, 개혁의 범위와 속도 등에 관한 견해차로 인해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개화당)로 분열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개화당은 임오군란이 발발하기 10년 전에 이미 결성돼 있었다. 따라서 임오군란은 이미 암약하고 있던 개화당이 고종에게 발탁돼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서 친청파 관료들(김윤식·김홍집·어윤중·조영하 등)과 특히 외교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시작한 계기로 봐야 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김옥균이 1882년에 도일해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가르침을 받고 비로소 조선의 자주독립과 개혁을 위해 헌신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또한 잘못된 견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김옥균과 박영효를 중심으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집단을 개화당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개화당을 자처한 것은 아니었다. 김옥균의 경우 갑신정변을 일으키기 불과 수개월 전인 1884년 5월에 일본에서 귀국한 뒤에야 비로소 ‘개화’를 운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일본 현지에서 후쿠자와 및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와 갑신정변을 공모한 것과 직접적 관계가 있었다. 원래 ‘개화’는 후쿠자와가 『西洋事情外篇』(1868)에서 civilization을 ‘文明開化’로 옮기면서부터 메이지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말이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에 대해 ‘개화’라는 말을 쓸 때의 정치적 의미는, 19세기 유럽인들이 제국주의적 침탈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백인의 의무’라는 미사여구를 내세운 것처럼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과 침략을 분식하기 위한 미명에 가까웠다. ‘개화당’은 1880년과 1881년 사이에 일본 언론과 외무당국에 의해 호명된 이름이었고, 일본이 추진하는 조선의 ‘개화’ 사업에 도움이 되는 정치세력이라는 뜻을 내포했다. 따라서 개화당이라는 이름은 이 비밀결사의 본질을 거의 반영하지 못한다. ‘개화당’이니까 당연히 일본식의 ‘문명개화’를 추구했다고 보는 것은 무의미한 동어반복(tautology)에 지나지 않는다. 후쿠자와가 설파한 개화와 개화당이 이해한 개화의 의미는 반드시 같지만은 않았으며, 또 같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우리 학계에서는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이 본격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지성계에서도 경제사회적 성장과 궤를 같이 하는 내재적 발전이 있었다는 선험적 전제 하에 조선후기 실학과 개항기의 개화사상 간에 사상적 인과관계를 입증하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사실 기존연구에서 개화사상이라는 개념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실학과의 관련성에 있다. 지금까지 이 주제와 관련해서 무수히 많은 연구가 축적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학에서 개화사상으로의 사상적 발전을 박규수를 중심으로 한 인적계보로 설명하는 것이나 개화사상이라는 개념의 정의조차 연구자에 따라 분분함을 면치 못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는 실학과 개화사상을 모두 곡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실학은 과도하게 근대지향적 사상으로 해석됐으며, 개화사상은 실학이 개항기의 국내외 환경에 조응해서 발전한 결과라는 것 외엔 독자적 사상체계로서의 의미를 거의 잃고 만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일종의 내재적 발전론이 역설적으로 식민사학과 구조적 유사성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모두 역사를 국가 위주의 목적론(teleology)으로 해석하며, 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시대적 과제는 공히 국가독립과 부국강병이고 그 유일한 길은 ‘개화’에 있었다는 확고한 전제를 공유한다. 이 때문에 단순히 ‘개화’가 日製가 아니라 실은 國産이었다고 강변하는 것으로는, 일본이 조일수호조규를 통해 조선을 강제로 ‘개국’시켰고 청일전쟁으로 비로소 조선을 ‘독립’시켜주었다는 식의 근대 일본의 역사인식의 틀을 완전히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개화당은 조선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외부의 힘을 끌어들여서 구체제를 타도하는 것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비밀결사였다. 개화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누구의 손이라도 기꺼이 잡을 용의가 있었으며, 따라서 이들에게 친일파나 친영파 같은 레터르를 붙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지금까지의 개화당 연구는 그 활동과 사상의 핵심인 외세와의 관련성을 애써 무시하거나 그 의미를 축소한 채, 이들을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민족의 선각자로 추앙해 왔다. 그 결과 김옥균과 개화당은 근대 내셔널리즘의 만신전(pantheon)에 봉안됐지만, 그들의 처절한 현실인식과 혁명적 사상이 망각된 것 또한 불가피한 귀결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문제부터 해방 이후 건국논쟁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근현대사의 아포리아의 연원을 거스르다보면 결국 한말 개화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다면 그 탈출의 실마리 또한 당대의 정치현실을 보다 핍진하게 이해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개화의 기원과 계보를 해석하는 데 있을 것이다.

 

김종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외교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편저로 『근대한국외교문서』(11책, 공편), 『근대한국 국제정치관 자료집 1: 개항·대한제국기』(공편), 역서로 『심행일기: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근대 일선관계의 연구』(2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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