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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과 인문학의 길
축적과 인문학의 길
  • 이강재 서울대·중문학
  • 승인 2017.07.10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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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이강재 서울대·중문학

“지식, 경험, 자금 따위를 모아서 쌓음. 또는 모아서 쌓은 것.”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蓄積’에 대한 설명이다.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모아서 쌓아두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2015년 서울대 공대 교수 26인의 대담을 엮었던 『축적의 시간』(이정동 책임집필, 지식노마드)이 보여준 문제의식은, 그 출발은 현재 우리나라의 공학 분야와 산업계에서 갖고 있는 발전의 정체라는 고민이지만, 다양한 분야의 학계가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모든 분야에서 장기간의 축적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무엇을’ ‘어떻게’라는 문제에 들어가면 답은 제각각이 되기 쉽다. 인문학 분야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다. 19세기부터 일본은 서양의 학문을 수입해 주요한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가면서 중국의 주요 고전을 대부분 일본어로 번역했고 중국의 전역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왔다. 그리고 이 축적의 결과 일본은 20세기 들어 거대 제국으로 가는 길을 갈 수 있었다. 일본이 결국 제국으로의 길을 갔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오랜 축적의 결과가 전체 사회를 발전시켜온 사례로서의 의미는 충분하다. 인문학 분야에서 최근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중요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일정 시기만 되면 노벨상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거듭하면서 동시에 기초학문에 대한 장기간의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매번 등장한다. 이때가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한 축적이 중시되지 않는 연구현실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최근 ‘축적’에 대한 두 번째 책 『축적의 길』(이정동 지음, 지식노마드, 2017)을 읽으면서 다시금 우리의 학문, 특히 내가 전공하는 분야를 생각해본다. 이전보다 학자의 수가 많아졌고 그에 따라 연구업적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연구가 빠져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즉 이 책에서 언급한 축적의 길에서 제시한 ‘개념설계’ 역량이란, 모든 분야의 기초가 되며 다른 설계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를 인문학의 세계로 가져와보면, 우선은 인문학 그 자체가 모든 학문의 ‘개념설계’에 해당된다. 이를 다시 인문학 분야에 한정해 생각해보면, 인문학이 기본적으로 문헌의 언어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연구는 당연히 기본이며, 각 문헌 생성과 전파에 대한 지식은 물론 고전문헌에 대한 정본화 작업 등 문헌에 대한 정확한 장악이 핵심적이고 출발점이 돼야 한다. 물론 여기의 문헌이라는 것이 이제 단순히 종이문헌만을 의미하지 않고 지하에서 출토된 문물자료나 디지털로 이뤄진 자료에까지 확대되고 있는 현실도 반영해야한다.

또한 문헌의 디지털화는 앞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인문학 분야의 ‘개념설계’에 대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전에는 문헌을 연구하면서 여러 판본을 구절마다 일일이 직접 대조해야했다면, 앞으로는 디지털로 된 파일을 특정 프로그램에 넣어보면 각 구절별 판본상의 차이가 아주 짧은 시간에 결과물로 주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다른 것으로 파악된 판본을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확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고전 속에서 찾아지는 인문학적 사유는 글자 하나에 의해 달리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무엇보다 정본화 작업을 거친 고전을 인문학적 사유의 세계에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때로는 사유의 세계가 정본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문헌학적 정리를 통해 정본을 확정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함은 분명하다. 따라서 문헌에 대한 정리와 이해 등이 문헌을 통해 학습하고 연구하는 인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여기에 인문학의 ‘개념설계’가 출발한다고 할 것이다.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갖춘 기계의 출현이 주었던 충격이 오래 전의 일이 아닌데, 이제 그것이 바둑과 같은 범주에서 끝나지 않고 인문학 지식의 습득과정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는 최근 구글이 진행하고 있는 구글북스(Google Books) 프로젝트가 단순히 주요대학의 서적을 스캔하고 그것을 텍스트로 변형해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멀지 않은 시기에 그것을 기계가 스스로 학습하도록 하는 단계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때가 되면 지식의 습득과 활용이 인간의 영역에서 어떤 자리를 갖게 될지에 대한 고민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무엇을 인문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설계’로 보아야 하는지 더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
 
실패와 시행착오의 경험이 축적돼야 더 한 층 높은 수준의 학문적 성취가 이뤄지는 것은 분명하다. 이 경험의 축적이 핵심적인 ‘개념설계’ 분야에서 이뤄진다면 그 결과로 얻게 되는 학문적 성취는 더욱 클 것이다. ‘축적’에 대한 두 권의 책을 접하면서 인문학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분야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있다.
 

 

이강재 서울대·중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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