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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여자강사로 산다는 것 / 서지문 (고려대 영문학)
[만파식적] 여자강사로 산다는 것 / 서지문 (고려대 영문학)
  • 교수신문
  • 승인 2001.01.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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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16 17:56:51
지난 봄, 어느 학회에 갔다가 돌아오는 중에 한발 먼저 귀가를 하고 있던 옛 제자를 만났다. 요즈음 너무 흔한 처지인,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와서 모교에서 강사를 하고 있는, 적어도 당분간은 처량한 사람이었다.
같이 차를 타고 오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요즈음 가르치고 있는 교양영어 반에서 어떤 남학생이 매시간 맨 앞줄에 앉아서 오만가지 조롱하는 표정을 짓는다며 고민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강사가 학생을 불러서 잘 타일러 태도를 고치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해법이다. 그와 별도로 연약한 여자 강사가 남학생들에게 무방비적으로 인격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교수나 강사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하는 학생을 징계하는 교칙을 제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날 나는 제자에게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세밀히 조언하기에는 몸이 너무 아팠고, 제자를 대신해서 학교당국에 제재나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고 결과가 불확실한데, 그 제자는 당장 너무 고통스러워서 잠을 못 자고 있다고 하기에 내가 그 학생을 불러서 다시는 그렇게 못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교수에게 방자하게 구는 학생들은 대부분 특정교사에게 보다는 교수라는 집단에 대해 어떤 반감을 갖고 있다. 그 반감은 교수들을 권력자, 자신들을 그 힘에 짓밟힐 수밖에 없는 무력자로 생각하는데서 오는 피해의식의 일종인데, 그래서 교수들에게 발칙한 행동을 하면서 일종의 투사로서의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말 힘이 있는, 그러니까 표나게 반항을 해서는 자기에게 큰 불이익이 돌아올 것 같은 교수에게는 반항을 하지 못하고, 아직 힘이 없고 심성도 약해 보이는 교수의 신경을 자극하면서 일종의 영웅심리를 맛본다. 그래서 학교당국에 대해 발언권이 없고 고통은 가장 많이 느낄 것이 분명한 젊은 여자 강사들이 그들의 표적이 되기가 쉽다.
과연 교학과를 통해 그 학생의 연락번호를 알아내어 내 연구실로 불러서, 힘없는 여강사에게 그런 박해를 가한다는 것은 비열한 행위가 아니냐고 했더니, 즉각 풀이 죽는 것이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히 무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강사에게 사과를 하고 앞으로는 수업시간에 공손한 자세로 경청을 하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공부를 끝내고 아직 안정된 전임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의 처지가 얼마나 고단한 것인 줄 아느냐, 학위는 혼자 죽도록 공부하면 딸 수 있지만 전임교수가 되는 것은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이 아니냐고 질책했더니 정말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 같이 보였다.
그 학생은 강사에게 사과는 하지 않았지만 그 날 이후로 수업태도가 완전히 달라졌고, 그 학기 끝의 강의평가서에도 반성문을 써냈다고 한다. 그래서 다행히 그 경우는 어렵지 않게 원만히 해결이 되었지만 얼마나 많은 여자강사들이 남학생들의 철없는 호기와 치졸한 영웅심리에 고통받고 모멸감을 참으면서, 그래도 그 시간이나마 계속 못 맡을까봐 조마조마하며 지식행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안타깝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이런 종류의 상황이 모두 앞의 경우처럼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학생들의 심리에 대한 통찰력은 오랜 교수생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부족의 젊은 강사들은 해결하기 어렵고, 학생을 불러도 어른으로서 타이르기가 힘들다. 특히 젊은 여자강사에게 이런 상황은 새로 출발하는 학자, 교육자로서의 자신감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후학양성의 기쁨을 두려움과 수치감으로 변화시키는 무서운 적이다.

학교당국에 학생들의 여자 강사에 대한 모욕적인 언행을 처벌하는 학칙제정을 요구했다가는 “그러니까 여자 강사는 되도록 안 쓰는 것이 좋다”는 말이 나올까 두렵다. 그러나 반드시 여자강사라고 못박지 않아도 학생들의 교수·강사에 대한 발칙한 행위를 벌할 수 있는 학칙이 있어야 고질적이거나 악질적인 학생들의 불손행위에서 강사·교수를 최소한이나마 보호할 수 있다고 본다.
학생들이 자기를 가르치는 여자 강사를 모욕하고 희롱조의 언행을 해도 학교에서 묵인한다면 강사의 괴로움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학생의 인격과 여성관도 왜곡돼 버린다. 우리사회의 건전한 시민을 길러내야 하는 교육기관으로서는 절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이 문제에 대한 교육부의 관심과 대학들의 성의가 절실히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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