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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건설’의 방식에 묻힌 공적 시스템들
여전히 ‘건설’의 방식에 묻힌 공적 시스템들
  • 박인석 명지대·건축학
  • 승인 2017.06.30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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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_『건축이 바꾼다』 박인석 지음, 도서출판 마티, 352쪽, 20,000원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미 바뀌었는데 이 사회를 ‘운영하려는’ 공적 시스템은 아직 건설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이는 비단 건축의 문제만이 아니다. 한국사회 전반에 깔린 문제다. 관료주의, 중앙집권주의, 칸막이행정 …… 분야를 막론하고 문제와 해결책을 정리하는 방식이 여전히 ‘건설의 방식’이다.

 

이 책은 건축의 산업규모, 즉 건축공사 총액 규모가 토목산업에 비해 월등히 크다는 사실, 전자·자동차·화학·철강 등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는 주요 제조업과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통계 그래프로 밝히면서 시작한다. 건축이 토목과 구분되지 않은 채 그저 건설업이나 토건산업으로 통용되는 현실, 그리고 구태여 산업규모를 따진다면 토목에 비해서도 훨씬 작은 산업이라고 생각하는 ‘보편적인’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원래 문제의식의 시작은 이게 아니었다. 내가 천착했던 문제는 우리 주변 일상공간의 남루한 모습이었다. 누구나 매일매일 지나치고 경험하는 동네 골목의 보잘 것 없는 건물들과 어지러운 간판들, 가뜩이나 여유 없는 골목공간을 메우고 있는 주차차량들. 왜 우리의 동네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 남루한 모습을 벗지 못하는 것일까. 왜 유럽이나 일본에서 보는 나름 질서 있고 정온한 동네 풍경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왜 파출소, 우체국, 주민센터, 국공립어린이집 같은 ‘공공’이 짓는 건축물들조차 볼품없이 지어지며 남루한 동네 모습을 오히려 더 남루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들은 한결같이 옹벽과 담장에 갇혀있을까. 왜 우리 동네 놀이터들은 모두 똑같은 모습에 똑같은 놀이기구들로 획일적이고 빈약하게 만들어질까. 

남루하고 삭막한 동네와 도시 풍경 뒤에는 건축설계를 설계가격으로 입찰하고 시공과정에 설계자가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법제도와 건축전문가 없이 건축사업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경직되고 비합리적인 행정절차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 십여 년 간 건축계 일각에서는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제법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오랜 기간 지속돼온 관행은 여간해서 변하지 않는다. 오늘도 설계용역을 가격입찰로 발주하는 행정은 계속되고 동네는 여전히 남루한 건물들로 채워지고 있다. 도대체 이 강고한 관행을 지속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러한 답답함은 이들 관행을 지난 50년간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건설 패러다임’과 연결할 때 명확하게 정리되기 시작한다. 건설 패러다임의 속성은 ‘중앙집권적으로 사전에 결정되는 전체계획’과 이에 따라 하달되는 ‘분업화된 표준적 업무절차’, 그리고 하달된 분장 업무를 추진하는 ‘분업적 행정조직’이다. 이러한 행정체제에서는 자연히 표준적 업무의 반복을 통한 효율이 추구된다. 1970, 80년대 국가적 과제였던 도로·교량·댐·항만·공업단지 등 기반시설 건설행정을 추진하는 데는 더없이 효율적인 행정체제였다. 이들 도구적 시설들은 표준적 성능 확보와 표준화된 업무처리절차에 의한 공기 단축 및 비용절감이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건축은 다르다. 건축은 삶터, 즉 장소를 만드는 일이다. 매번 다른 땅 다른 자리에서 매번 다른 장소를 만드는 일이다. 매번 주변 조건이 다르고 요구되는 건축의 내용도 다르다. 건축과정에서 협력하는 상대도 갈등하는 대상도 매번 다르다. 건축적 방식이 갖는 본질적 속성이다. 건축만이 아니다. 사람들 간 관계를 다루는 일들, 처해진 상황마다 달라지는 조건에의 대응이 중요한 일들은 모두 마찬가지다. 당연히 매번 새로운 판단과 새로운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 한국사회는 기반시설과 전문인력의 절대량이 부족한 채 양적 충족이 우선되는 사회였다. 표준 기준과 업무절차에 따라 ‘빨리 빨리’ 추진하는 것이 제일의적 덕목이었다. 이런 와중에 개별적인 대응이 중요한 업무들의 질적 측면이 훼손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로, 불가피한 손실로 치부됐다.

한국사회의 변화―이미 건축의 시대다

1990년대를 경유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국민총생산(GDP) 증가가 가팔라졌고 다른 경제지표들도 근본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일만 달러를 넘어선 것이 1994년이고, 자동차보급대수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도, 65세 이상 고령인구 증가율이 가팔라지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였다. 

이 시기에 건축 생산량도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 10조 원을 밑돌던 건축공사 수주액은 1990년대 중반 70조원, 2015년 220조원으로 커졌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경계로 건설투자 비중이 급감했다는 사실과 함께 묶어서 본다면 이는 확실히 한국사회에 ‘구조적’ 변화가 있었음을 가리킨다. 총 경제에서 건설업의 비중이 줄어든 동시에 건설업 내부에서는 토목에 비해 건축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지는 ‘이중적 구조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건축시장 팽창의 주인공이 민간부문 건축시장이라는 사실이다. 전자·화학·자동차·철강 등 제조업과 이에 따른 각종 서비스산업들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건설업의 상대적 비중은 줄어들었지만 이들 산업활동에 필수적인 건축생산이 더불어 급팽창한 것이다. 요컨대 한국사회가 작동하는 구조 자체가 달라졌다. 경제활동의 양적 규모와 질적 다양성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미 중앙의 통솔력과 일사불란한 행정체계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개별적 주체들의 자율적 결정과 복합적 관계망 속에서 힘이 생성되고 강화되는 그런 사회로 바뀌었다. 경제든 문화든 사회를 작동하고 운영하는 모든 활동의 힘은 ‘개별적 활동’에서 나오는 사회. 이미 이십년 전에 한국사회는 그런 사회가 되었다.

현 단계 한국사회의 핵심적 과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미 바뀌었는데 이 사회를 ‘운영하려는’ 공적 시스템은 아직 건설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이는 비단 건축의 문제만이 아니다. 한국사회 전반에 깔린 문제다. 관료주의, 중앙집권주의, 칸막이행정 …… 분야를 막론하고 문제와 해결책을 정리하는 방식이 여전히 ‘건설의 방식’이다. ‘표준적 업무절차의 분업적·반복적 수행’을 전제로 한 문제 설정과 해결책(정책)들, 이러한 업무를 강제하며 다시 그 패러다임을 재생산하는 제도들. 이것이 공적 시스템 전체에 만연한 채 다음 단계로 진전하려는 한국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건축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건설의 방식’을 비단 건축 분야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는 순간 건축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욱 날카로워진다. 단순히 비합리적인 건축 제도나 행정의 비효율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 공적 시스템 전체가 건설의 방식에 묻혀서 ‘건축(적 방식)’으로 창출되는 가치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 아예 건축으로 창출될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 건축적 방식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에 무지할 뿐 아니라 이를 비효율이라 여기며 부정하는 인식들이 만연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건축이 마주하고 있는 ‘진짜 문제’다.

이러한 문제 틀 아래에서 건축이 맞닥뜨린 문제들과 그 해결책을 하나하나 다시 정리했다. 남루한 공공건축을 반복하는 비합리적 행정 뒤에는 건축을 도구적 시설로 간주하면서 ‘복사용지 몇 박스’ 조달하듯 빠르고 값싸게 조달하도록 강제하는 법제도와 행정절차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획일적인 학교건축과 지지부진한 도시재생정책 뒤에는 ‘분업적 업무처리’가 관행화된 칸막이행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건설 패러다임’의 질곡이 빚어낸 일들이다. 이 모든 세세한 일들을 ‘건설의 방식’에서 ‘건축의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 모든 실천과제의 핵심이다. 그것은 건축을 살리는 일임과 동시에 나라를 살리는 가장 중차대한 일이다.

 

박인석 명지대·건축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동산 개발 시각에 편향된 한국의 도시·주거건축 담론을 건강한 논의와 실천적 과제 생산의 장으로 진전시키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저서로 『아파트 한국사회』, 『아파트와 바꾼 집』(공저), 『한국 공동주택계획의 역사』(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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