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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각화·‘빛살’무늬토기 등에서 찾은 한국서예의 始原
암각화·‘빛살’무늬토기 등에서 찾은 한국서예의 始原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6.23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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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한국서예문화사』 조수현 지음, 곽노봉 감수, 도서출판 다운샘, 736쪽 60,000원

1986년 석사학위 논문으로 「한국서예의 사적 고찰」을 발표한 이후 「한국고대 3국의 금석문 서체의 특징」, 「고운 최치원의 서체 특징과 동인의식」 등을 꾸준히 발표했던 조수현 원광대 명예교수가 노작 『한국서예문화사』를 완성했다. 『한국 금석문 법서 전집』(전 10권) 등을 내놨던 그의 이력으로 본다면, 이번 『한국서예문화사』는 다소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반가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왜 그런가. 저자의 말을 들어보면 이해가 된다. 정년을 맞아 강단을 떠나 돌아보니, 연구자를 양성하고 작가와 학자를 길러 이들이 書壇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서예학도로서의 긍지요 보람이지만, 적당한 교과서를 갖추지 못해 학생들을 힘들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을 금하기 어렵다고 회고했다. “특히 서예학계가 알맞은 『한국서예사』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에게도 커다란 숙제였다. 이를 위해 재직 중에 각종 자료를 모아 정리하는 작업을 쉬지 않았지만 끝맺기 어려웠다. 퇴직후 집중적으로 정리해 일단의 형태를 갖춘 것이 이 책이다.”각 시대의 학식·지혜·기예를 응축한다는 의미에서 서예는 ‘정신문화의 맥박’이라고 말하는 저자에게 ‘한국서예사’는 반드시 정리해야 하는 과제였던 것이다. 

일단 이 책은, 한국서예사의 시원에서부터 역사적 전개과정을 정리하고, 한글 서예사와 한국 전각사까지 포함했다. 그는 암각화와 ‘빛살’무늬토기, 귀갑수골문 등에서 한국서예의 시원을 읽어냈다. 이후 고조선과 낙랑의 서예, 고구려의 서예, 백제의 서예, 신라의 서예, 통일신라의 서예, 발해의 서예까지 다룬 뒤, 고려의 서예, 조선의 서예,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서예, 광복 이후의 서예로 통시적 접근을 취했다. 따로 ‘하편’에 한글 서예사와 한국의 전각사를 넣었다. 여기서 볼 수 있듯, 독특한 게 ‘한국서예의 시원’ 부분이다. 

“한국서예의 시원은 암각화·빛살무늬토기 등에서 찾고자 한다”라고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암각화란, 『한국금석문자료집』(국립문화재연구소, 2005)에 수록된 ‘울주천전리각석’, ‘고령양전동암각화’, ‘남원대곡리암각화’, ‘남해상주리각석’, ‘울주대곡리반구대암각화’ 등을 말한다. 예컨대 ‘남해상주리각석’을 설명한 대목을 보자. 

“‘南海尙州里刻石’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로 가로 7m, 세로 4m의 평평한 바위 위에다 가로 1m, 세로 50cm 크기로 새겨져 있다. 이를 ‘徐불題名刻字’라고도 한다. 그림문자로 상주명 양아리에서 錦山 부소암으로 오르는 산중턱 평평한 자연석에 새겨진 특이한 형태의 조각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중국 시황제의 명령으로 方士인 서불이 三神山에서 불로초를 구하려고 童男童女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이곳 남해 금산을 찾아와서 한동안 수렵을 즐기다가 떠나면서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새겨넣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시황제 때 이미 漢文字가 사용된 점으로 미뤄보면, 이전의 古文字로 추측하고 있으나 아직 해독되지 않고 있다. 1860년 역매 오경석이 이 탑본을 연경에 가지고 가서 중국학자에게 문의했는데, 당시 금석학에 조예가 깊은 何秋濤(1824~1862)는 ‘徐불起禮日出’이라 풀었다고 한다. 위창 오세창은 이를 이사가 전서를 만들기 이전의 秦國 주문이라 하면서 동방의 석문 가운데 최대라고 했다.”

물론 저자는 ‘신지글자는 우리 민족 고유문자’라고 주장하는 북한 학자 박영도의 의견(‘서불’이라는 말은 결코 그 어떤 다른 나라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사라보로/서러부루/사보로/서부루’라는 우리나라의 옛 겨레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도 조심스럽게 첨부했다. 

그래서일까. 흥미롭게도 바로 이 ‘남해상주리각석’에서 저자 스스로가 영감을 얻어 작품‘ 남해상주리각석’을 창작하기도 했다(그림 참조).

‘빛살’무늬토기 역시 이러한 ‘민족 고유의 시원성’과 만나면서 새롭게 읽혀진다. 저자가 근원 김양동 교수의 ‘빛살무늬토기론’을 일리있는 견해로 수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양동 교수는 “태양을 숭배하고 천손족으로 자처한 우리민족의 고유사상은 광명사상이다. 곧 빛살사상이다. 광명사상은 다시 홍익사상으로 진화 발전한다. 이러한 고유사상을 문양화한 것이 ‘빛살무늬’이다. 다시 말해 ‘빛살무늬’는 태양의 광명을 간결하게 디자인한 고대적 양식으로서 ‘밝과 환한 세계, 빛살의 생명세계’가 그 원형질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암각화와 빛살무늬토기가 ‘상징적 시원성’의 지평에 있다면, 보다 구체적인 시원성은 ‘龜甲獸骨文’에 있다. “귀갑수골문은 거북의 복갑이나 짐승의 뼈에 글자를 새겨 넣고 불에 태워 길흉화복을 내다보는 점괘로 갑골문·占卜文”인데, 저자는 진태하 교수의 학설(漢字는 한족이 만든 문자가 아니라, 한민족의 조상들이 참여해 만든 문자다)을 수용해 이를 한국서예사의 시원으로 호명했다.

책의 추천사를 쓴 근원 김양동 교수는 “기왕의 한국 서예사 논저들이 다소 불완전하고 충분한 자료를 활용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면, 본서는 이런 단점을 보완해 적극적으로 도판을 채운 장점이 두드러진다. 저자는 국내 최고 최대의 금석문 탁본을 보유한 원광대학교 박물관 관장 겸 서예과 교수답게 자료 활용에 있어서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런 평가가 있다고 해서 조수현 교수의 ‘한국서예사’를 앞으로 나올 한국서예사의 가장 모범적인 典範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 서예의 역사라고 한다면, 역시 일관된 내적 원리, 서예의 미적 진화원리의 해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은  후학들이 짊어져야할 몫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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