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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인터뷰]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2.12.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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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출혈로 반신이 마비됐지. 12cc 정도 출혈해서 오른쪽으로 마비가 왔는데, 그래도 이만한 것이 다행이지.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니. 여러 번 형무소에서 추운 겨울을 나서인지 조금만 바람이 차게 불어도 기관지가 수축해서 숨을 못 쉬겠어.” 건강을 묻는 질문에 대한 리영희 교수의 답변이다. 간만에 눈이 소복하게 내린 지난 9일, 경기도 산본의 아파트촌에 있는 리 교수의 자택을 찾아간 시간은 늦은 오전을 막 지난 때였다.

“이제 나는 지나간 세대지. 지금도 마음은, 의식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협조관계, 남북문제, 한일문제, 미국문제, 한반도의 지역적 이해…관련한 문제들이 많아. 그런데 건강이 안 좋아서 그거 돌보느라고 예전 같지 않지”라며 마비가 오는 오른손을 연신 주무른다.

지금의 건강이 마치 당시의 숱한 정권 탄압으로 인한 결과인 것 같아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자적 신념을 지킨 것에 후회는 없는지 말이다. “그 과정 과정에서는 늘 무섭고 두려웠지. 우리 어머니는 내가 형무소 안에 있을 때 기소도 안 되고 조사 받는 과정에 돌아가셨으니까. 9번 강제연행 되고, 7번 입건되고, 5번 구속되고 그리고 2번 기소유예와 기소중지로 석방되고, 3번을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으로 유죄판결 받고. 그런 사이에 신문사에서 부장자리 두 번을 권력의 압력에 의해 쫓겨나고, 1970년대 대학에 있을 때는 박정희 정권 때, 전두환 정권 때 한번씩 추방 해직됐다가 다시 복직하고. 그야 보통 어려움이 아니고, 말을 해도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없어요. 근데 왜 일관되게 그렇게 살았느냐 라고 물으면, 상황이 조금이라도 변했으면 모르겠는데 점점 더 거짓과 인간 부정의 체제가 더욱 굳어가니까 누군가 그에 대항해서 이론적으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살아나는 거야.”

아무도 입을 열지 않던 시절, 1974년 ‘전환시대의 논리’를 펴냈을 때만 해도 그는 40대 중반의 한창나이였다. 일제때 중고교 시절을 보내고, 해방 후 미국 지배하의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보았다. 한국전쟁 당시 7년간의 군생활은 야만과 폭력, 비인간화와 거짓으로 가득 찬 현실을 깨닫게 하는 촉매가 됐다. 한국 근대사의 고난이 한 개인의 삶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경험이 같은 행동을 끌어내지는 않는다. “60년대만해도 개인은 인격이 없는 개인이었거든. 자신의 자유로운 사유능력, 삶과 자신의 생존관계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인식 능력을 상실한 개인은 이미 인격이 없는 개인이라 말이야. 그런데 60~70년대 우리 국민은 거짓된 신앙체계로 자신을 구속하고 있었어. 그것을 깨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 것이지.” 그의 말을 빌자면 ‘전환시대의 논리’는 “세상이 뒤집어질 것 같은 충격을 줬던” 책들이었다. 냉전시대의 논리가 가득 찾던 시절, 반쪽짜리 진리만이 있던 시절에 보이지 않던 반쪽을 알리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만큼 시대도 많이 변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리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환시대의 논리’ 이후 당시의 젊은이들이 사상적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했고 이제는 노동자로 학자로 사회에 자리잡았어. 예전 같으면 정권에 얼씬도 못할 권영길 후보가 나오고, 그런걸 보면 그래도 많이 변했지. 어쩌면 내 ‘전환시대의 논리’가 씨를 뿌린 공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러나 60년대, 70년대, 80년대 그 많은 젊은이들이 노동자들이 핍박받고 죽고 그랬는데, 그 희생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해. 이만큼이라도 변한 것도 대단하다고 자위하는 거지. 이제 자유로운 인간을 기준으로 할 때 절반의 인격을 누리는 정도지.” 그러나 리 교수의
눈에는 아쉬움이 어린다.

그는 냉전체제 붕괴 이후 중립노선을 걸은 것은 아니냐는 일부의 평가에 대해 일관된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표했다. “좌파나 우파를 이분법적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또 이분법적인 분류가 건전한 것은 아니고. 옳은 말만 쓰면 된다 이거야. 옳은 말이라면. 그런데 그것을 받아주는 지면이 아니면, 체제에 영합하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 문제지.” 리 교수는 자신의 학문 여정을 “권력과 체제의 거짓으로부터 개인의 인격을 해방”이라고 축약했다. 치열하게 자료를 수집하면서 정권의 프로파간다에 대항한 그의 행로 기저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흐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제 인격을 완전히 누리게 하고 싶다는 소박한 애정 말이다.

다시 미군 장갑차 사건을 필두로 불거지고 있는 미국과의 갈등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고희를 넘긴 노학자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그가 찾은 해답의 실마리는 다름 아닌 남북관계. “미국의 행패를 해결하는 문제는 우리민족 내부에서 남북간 관계의 긴장을 해소하는 거야. 남북간에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 의사가 없다, 그러면서 협력한다 그러면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적인 공존을 하고. 그러면 대립하고 전쟁하고 증오하고 했던 시기에 필요했던 군대와 군사력, 그때 와줬던 미국군대 이제는 필요가 없게 되는 거지. 적어도 남북 관계의 긴장 완화와 반비례해서 그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주한 미군의 문제는 바로 남북 관계의 문제야.”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이제는 활발히 저항들도 하고 시끌시끌하더군. 그런데 지식인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쉬운 일이야. 아쉬운 일이지.” 70년대에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학계의 침묵이 여전히 이어진다는 우려 때문인지, 혹은 더딘 대항이 아쉬운지 그는 말끝을 흐렸다.

리 교수는 지금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학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이런 몸으로 뭘 더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이지. 이제는 깊이 있는 책들을 보면서 내적 성찰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해.” 인터뷰 말미에 리 교수가 덧붙인 말이었다. ‘절반의 인격’과 맞바꾼 그의 삶, 아직 되찾아야 할 절반의 인격이 남았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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